[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After Rain는 현대 유럽에서 단편소설의 대가라고 인정받는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 모음집이다. 12편의 단편을 묶어서 1996년에 출간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가 영국에서 살면서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평안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상황 속에서 고유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잘 나가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상처 난 삶의 조각들을 적나라하지만 담담하게 그렸다.
트레버는 1989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 중에서 평범한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웅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웅은 실제로 단편 소설에 속하지 않아요. 프랭크 오코너(Frank O'Connor)가 말했듯이, 단편 소설은 작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는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비영웅적인 면이 성공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전처의 망령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벨의 이야기(조율사의 아내들), 정신문제를 갖고 있는 아들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어머니(길버트의 어머니), 사제와 관계하여 임신한 딸을 나이 많은 감자 장수와 결혼시켜 문제를 덮으려는 가족 이야기(감자 장수)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면서 공동체의 폭력과 침묵이 삶을 파괴하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실추 Lost Ground) 등 약간 독특하고 충격적인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몰입하기 어렵기도 했다. 인물들의 선택이 납득되지 않아서 편안하게 읽을 수 없다고나 할까?
트레버의 단편소설은 인상파 화가들의 순간 포착 그림처럼, 삶의 결정적인 장면을 잡아서 그것이 미친 내적, 정서적 감정을 치밀하게 묘사한다. 작가는 일상적 평안이 깨지고 균형이 어그러지는 순간에 주목하고 그것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지키면서 송곳처럼 날카롭고 예리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담담한 시선과는 달리 독자인 나는 여러 감정들로 마음이 출렁거린다. 존재론적인 불안, 단절로 인한 외로움, 충족되지 못한 문제로 인한 결핍감 등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주인공들을 보려니 입안이 까슬까슬하고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트레버 단편의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정확하고 생생한 묘사와 설정된 인물상의 흔들림 없는 정밀한, 칼같이 예리하지만 동시에 불가사의한 부드러움을 지닌 소설적 시선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에 나오는 그 소설적 시선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당하지 어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이야기는 《아이의 놀이》(Child’s Play)와 《데이미언과 결혼하기》(Marrying Damian)다.
《아이의 놀이》는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인해 남매가 된 두 아이가 ‘결혼과 이혼 놀이’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괜찮지 않다. 변덕이 심한 부모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도 어렵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은 무력하고 외로운 마음을 놀이라는 형태로 재연하면서 스스로 다독이고 위로한다. 상처받고 버림받은 결핍감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메꾸려는 모습이 안쓰럽다.
《데이미언과 결혼하기》는 오랜 친구와 어린 딸이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복잡한 마음을 보여준다. 평생을 가난하고 자유로운 방랑자로 살아온 친구를 미워할 수도 없고, 둘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면 그 부모의 마음을 어떨까? 순전히 부모의 입장에 이입하여 친구에게 따끔한 경고를 하고, 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은 우리를 시험대에 자주 올려놓는다. 변덕스럽고 우호적이지 않는 운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 답을 찾기에 소설만큼 좋은 교재도 없는 것 같다. 다양한 삶의 조건에서 주인공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그 사례를 통해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 좋다.
독자인 나는 주인공들이 투쟁적으로 맞서 싸우고 용감하게 이겨내기를 바라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못한다. 문제에 눌려서 체념하거나 포기하고 삶의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실 그런 찌질한 주인공들이 대부분이기에 “소설 같은”이라거나 “소설처럼”이라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트레버가 그리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삶이 준 상처와 고통스러운 상황에 맞서 내적인 방황을 겪으며 나름대로 포용하려고 한다. 일상의 순간순간 고통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낸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인물들의 서사에 대해 옮긴이 정영목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어떤 면에서는 삶이 곧 상처이며, 결국 이 상처를 삶으로서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이르는 과정인 듯하다. 그렇다고 체념은 또 아닌데,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은 삶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곡절을 헤아리느라 안간힘을 쓰고, 결국 자기 나름의 이해에 이르면서 이렇게 되고 만 현재를 필연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트레버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끝까지 읽을 동기가 되기도 했다. 매끄럽지 않은 삶, 불완전한 인간관계,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잔재들이 읽는 내내 마음속에 남았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독자로서 나는 판단하기보다는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으로 그저 그 인물들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떤 장면에서는 슬퍼하고, 화내고, 때로는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위안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문학의 역할은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감하고 함께 살아내는 감정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 온 뒤》라는 제목처럼, 인물들의 삶에도 언제나 비가 온다. 하지만 작가는 그 비를 그치게 하지 않는다. 대신 비를 맞고도 걸어가는 사람들, 혹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 있는 사람들의 내면을 끝까지 함께 바라본다. 그 점이 답답하고 재미없는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더욱 특별한 것이 되어 유명 작가들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나 보다. 트레버의 인물들은 우리처럼 상처받고, 망설이고, 후회하고, 외로워하면서도 결국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작가는 조용히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책 속으로
그러나 개와 텔레비전이 있어도, 집에 느는 살림과 없애는 살림이 있어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무척이나 신실한 다짐을 받아도, 착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벨에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남편의 팔을 잡아주었던 여자, 피아노를 살살 달래 되살아나게 하는 남편을 여러 집으로 방으로 안내한 여자가 여전히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성가신 유령, 불확실하게 존재하는 어떤 용서 없는 망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일부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 안에 남겨진 것 같았다. -<조율사의 아내들>
그들의 결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자식과 손자들에게, 그 결혼을 좋게 말해준 목소리들에, 그들이 함께 쓴 침대에, 기억에. 그가 말한 당분간에도 끝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것도 그가 한 말이었다. “잘 버티고 있어요, 캐서린?” 사람들이 종종 똑같은 표현으로 물었고, 그녀는 거기 있었던 모든 것에서 여전히 힘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과부들>
첫 앵초가 과수원의 따뜻하게 마른 둑을 장식할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올해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눈에 익은 이 꽃도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꽃들을 다른 방향에서 보게 되었다. <실추>
해리엇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연애도 한때는 그전의 다른 연애들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각자의 길로 가면서 그녀의 삶을 너무도 쓸쓸하게 채색해 버린 실망이라는 감정을 몰아내주는 듯했다. 부모는 헤어지면서 싸우지 않았다. 신랄함도, 드라마도 없었다. 그들은 자식들에게 상냥하게 둘 다 상대를 탓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ㅡ아마도 오랫동안ㅡ다른 사람들과 얽혀 있었다. 둘 다 가족을 위해 헤어지는 것이 함께 있는 것보다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표현을 사용했고, 해리엇은 절대 그것을 잊지 못했다. 오빠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실망감을 떨쳐버렸지만, 해리엇에게는 이 감정이 처음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연애가 끝날 때면 결국 아무것도 몰아내지 못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비 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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