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2023)
우리는 모두 ‘맡겨진 아이’다.
이 지구별에 내려올 때,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는 약하고 무력한 몸을 입고 온다. 일반적으로 부모나 지역, 신체적 조건 등은 선택할 수 없다고 한다. 영혼이나 임사 체험을 다룬 영성 이론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선택하고 온다고 한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연약한 몸과 마음은 적절한 돌봄과 사랑이 필요하다.
존 보올비 Edward John Mostyn Bowlby 의 애착 이론에 따르면 아기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도록 유전적인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극적인 사례지만, 1990년 독재자 차우셰스쿠 정권 시절, 루마니아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은 인간이 안아주고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수의 직원들이 수백 명의 고아들을 관리하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굶거나, 학대받지 않았지만, 몸과 마음의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상 행동과 감정 없는 행태를 보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사랑과 관심, 따뜻한 보살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보여준 안타깝고 비극적인 역사다.
학교에서도 문제 행동을 보이는 많은 학생들을 보면, 가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 정서적으로 결핍이 있는 경우에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상황에 맞는 과장되고 부적절한 행동으로 자신을 내보이려고 한다. 이 부분이 교사로서 제일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맡겨진 소녀』는 엄마가 동생을 낳는 동안 친척 집에 맡겨지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아이가 살아가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존심만 높고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와 농장 일과 살림과 육아에 지친 엄마를 부모로 두고 있다. 아이는 제대로 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 부모의 손길이 늘 그립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는 방치된 채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아버지는 삶의 무게에 눌려 현실을 도피한다. 크게 한탕을 꿈꾸며 노름을 하고 농가의 자산인 소까지 잃는다. 책임감이 없고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겠지.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이런 캐릭터가 극단적으로 내몰리면 중독에 빠지고 폭력을 휘두르기 쉽다. 아버지 또한 ‘맡겨진 아이’ 시절에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몸만 어른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내면의 어린아이가 제대로 크지 못해 ‘어른 아이’의 행동을 하고 있다. 책임지기 힘들고 ‘나’만 알아달라고 한다. 아이를 뒷자리에 태우고 아내의 친척 집으로 가는 길, 아빠는 귀찮은 짐을 떠맡은 것 같다.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길에서 아는 여자를 옆에 태우고 시시덕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를 맡아준 친척에게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이 가방도 차에 그대로 싣고 황급히 떠나버린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엄마는 순종적이지만 억척같은 생활력을 발휘해 휘청거리는 가정을 붙들고 있다. 아이들을 챙기고 농사일을 하고 살림을 한다. 밖으로만 나돌면서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고, 살림이나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크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는다. 가끔 남자는 완력을 써서 여자와의 잠자리를 갖고 아이들은 늘어만 간다. 벌써 딸 셋에 뱃속의 아이까지. 엄마는 힘겨운 일상이지만 최선을 다하려 한다. 아기 출산을 앞두고 먼 친척 집에 맡겨진 셋째 딸에게 그래도 좋은 옷을 입히고 가방도 챙겨준다. 안쓰럽고 따스한 눈길을 담아 아이를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느껴진다.
아이를 맡은 킨셀라 부부는 ‘맡겨진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 돌보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낯선 곳에 내던져진 것 같은 소녀는 첫날밤에 이불에 소변을 지릴 정도로 당황스럽고 어렵다. 에드나는 재치 있게 눅눅한 공기를 탓하며 침구를 햇볕에 말린다. 아이가 수치심을 덜 느끼도록 문제를 해결한다. 요리나 물 기르기 등 집안의 자잘한 것들을 함께 하면서 아이가 ‘주체로서’ 참여할 기회를 준다. 아이는 부부가 전하는 다정함과 따스함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사랑은 스며드는 것이라고, 존 아저씨와도 점차 서먹함을 깨트리고 가까워진다. 축사를 함께 치우고, 우편물 심부름을 시키고 달리는 시간을 체크해 주면서 아이를 격려한다. 자신감을 몰랐던 아이는 자신의 힘을 인식하며 자신감 있는 밝은 표정을 보인다.
이웃 아줌마의 오지랖 참견으로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고 킨셀라 부부의 깊은 아픔의 생채기가 덧난다. 지금 소녀 또래 나이의 외아들을 잃었다. 익사 사고였다. 그 찢어지는 마음, 자신에 대한 원망과 자책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아들의 옷을 입은 소녀를 보면서 두 사람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눈물겹고 절절하다. 어린 소녀는 그 아픔을 함께 느낀다. 존 아저씨와 바닷가를 함께 걸으며 멀리 불빛 세 개를 찾으며 진정한 가족 같은 따스함을 경험한다.
자녀를 잃은 부부가 그 크나큰 아픔과 상실감으로 인해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도 많다. 킨셀라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하면서 관계가 더 깊어진 경우여서 다행이다. 인생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고 사랑과 연민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은 상처를 별로 만들 줄 안다. 두 사람에게 플루타르코스의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을 들려주고 싶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의 글 모음 중에는 <아내에게 주는 위로의 글>이 있다. 자신이 일 때문에 집을 떠나 있던 동안 가장 예뻐했던 딸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고, 집으로 달려가며 아내에게 쓴 편지다
"하지만 여보. 나는 이런 것들이 그 애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를 즐겁게 해 주다가 지금은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우리에게 왜 고통과 슬픔을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소. 그런가 하면 나는 또 고통스러운 생각과 함께 그 아이에 대한 기억도 지워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렵소. (..) 그러나 우리 딸은 우리가 어루만지고 보고 들을 수 있던.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던 존재인 만큼 그 아이에 대한 회상도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살아있어야 하오. 그것은 슬픔보다 훨씬 많은 기쁨을 안겨주기 때문이오.
- 이호,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에서 인용
시간이 흘러 엄마가 남동생을 낳고, 방학도 끝나 학교에 가야 해서 이들은 이별을 해야 한다. 문밖으로 뛰어가 아저씨 품에 안긴 아이, 그 안타깝고 가슴 저린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아빠!”
세 사람이 계속 함께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킨셀라 부부는 잠깐이지만 소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를 보살피는” 사랑이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고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맡겨진 소녀는 한여름 동안 한 사람의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배려를 받았다. 가족의 따스한 사랑을 경험하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내적 인식을 얻었다. 가족들이 몰라볼 정도로 몸과 마음이 한 뼘 자란 것이다. 원래 가정으로 돌아온 소녀의 내면은 충만한 사랑으로 단단해져서 꺼지지 않는 불꽃을 키워가지 않을까?
인간은 서로를 보살피는 종(種)이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그 돌봄과 보살핌이 어떻게 서로를 살리는지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맡겨진 아이’였던 우리가 성장해서 ‘귀한 존재를 맡은 자’로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역할과 책임을 다시 무겁게 돌아보게 한다. 공동체와 사회와 국가 또한 돌보는 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