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와 심곡서원, 정조와 화성행궁
여행은 새로운 만남이다. 오늘 나는 역사를 새롭게 만났다.
찬 바람과 함께 겨울비가 내리는 토요일, 용인 심곡서원과 수원 화성행궁을 다녀왔다.
인천 길꿈여행인문학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평화인문학 강연을 마무리하는 답사 프로그램이다.
학농일치를 실천하는 취래원 농사 황보윤식선생님의 해박한 역사 해설이 더해져서 풍성한 탐방이 되었다. 소풍여행사를 운영하는 김광성관장님의 추진력과 꼼꼼하고 세심한 배려가 돋보여 추운 날씨에도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서원은 위패를 모신 사당과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교육하는 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대를 양성하는 공간으로, 사림의 세력을 키우는 곳이 되기도 했다.
심곡서원은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 그리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광조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에 있다. 효종으로부터 '심곡'이라는 현판과 함께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은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라는 칼날을 피한 서원이라니 역사적인 의미가 더 빛난다. 2015년에 사적문화재 제530호로 승격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사액서원은 공부에 필요한 책과 넓은 토지와 노비까지 하사 받는다고 한다. 현재 심곡서원은 단출하고 아담한 크기의 사원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느낌이 쓸쓸함을 자아냈다. 노비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지은 땅에는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서원 앞 공터를 경기도에서 심곡서원 역사 공원으로 조성 공사 중이었다. 공원이 완성된 후 따스한 날씨에 다시 오면 좋을 것 같다. 기묘사화 전에 조광조가 심었다는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잎을 떨구고도 의연하게 그의 꿋꿋한 마음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인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달라지고, 공간은 부침이 심하지만 오래된 나무는 모든 것을 품고 말없이 서 있다. 그 나무들이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이고 살아있는 기록자가 아닐까?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도학(道學) 사상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을 꿈꾼 조광조, 중종의 깊은 신임을 얻어 빠른 속도로 승진해서 주요 관직을 맡았다.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판을 기획하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고여서 썩은 물을 과감히 퍼내려고 했다. 도교 행사를 주관하는 국가 기관인 소격서를 미신 타파와 유교적 이념 실현을 명분으로 없애려고 하는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반대와 중종의 심리적, 정치적 부담에 부딪친다.
정치적 싸움에서 밀린 그는 1519년 기묘사화로 전라남도 능주(현 화순)에 유배되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훈구 세력을 견제하며 왕권 강화를 모색한 선조에 의해 신원되고 복원되어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어 '동방 5현'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으니, 억울한 죽음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가 있어 둘러보았다.
선조 때 조성된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 화성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전라도식 쌈밥집인데, 반찬 가짓수도 많고 맛도 좋아서 차가운 몸과 마음까지 따스하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수원 화성행궁
작년 6월에 친구들과 수원 화성에서 1박을 하며 화성행궁을 천천히 둘러보고 성곽도 걸었다. 날씨도 좋고, 외국인들도 많이 만났다. 오늘은 비도 내리고 날도 차가워서 그런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고즈넉하고 조금은 썰렁한 느낌을 자아냈다. 화성행궁은 정조의 꿈과 고뇌,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담긴 공간이다. 후대 사람들이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여 묵상하듯 공간을 둘러보게 된다.
창경궁에서 화성 행궁까지 어떻게 이동했을까?
왕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수백 명이 8일간의 행궁을 위해 도열하여 이동하고, 그 많은 식솔들이 먹고 자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으리라.
화성행궁의궤도! 역시 기록하는 민족은 흔적을 남긴다.
왕이 행차하는 장면을 세세하고 꼼꼼하게 그린 장면들을 보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간다. 역사박물관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 영상으로 만들어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돕고 있었다.
실제로 수원화성도 전쟁 등으로 불타고 없어진 것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로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화성성역의궤』는 축성 당시의 모습과 공법이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수원 화성행궁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이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덕분에 오늘날 수원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나는 생생한 현장이 되고 있다. 기록 문화를 가진 민족, 기록을 역사로 남긴 우리 민족의 장점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수원 화성 축조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현륭원),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현재의 수원 화성 자리로 이주시킨 새로운 도시 건설 계획에서 출발했다. 실학자 정약용이 중심이 되어 설계 및 총괄 감독을 맡았다. 거중기 등 새로운 과학 기술이 도입되어 공사기간을 단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정조는 화성 축조 과정에서 백성들의 노고를 줄이고 공사 비용을 투명하게 관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 성곽의 형태, 건축물 배치, 자재 조달 계획, 인력 동원 계획 등 모든 과정이 문자와 그림으로 상세히 설계하고 공사 완료 후 모든 과정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조광조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한 급진적 개혁가로 배웠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이번 기행을 통해 조광조라는 인물에 대해, 서원의 역할과 구조, 심곡서원에 대해 조금이나마 새롭게 알게 되어 기쁘다.
만약에 조광조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만약에 정조가 영조처럼 오래 왕위에 머물며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했다면?
이후에 이어지는 지난한 역사를 바꿀 수 있었을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을까?
역사를 생각하면서 '만약 ~했다면'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그만큼 안타까움과 억울함과 희망사항이 크다는 반응이겠지?
나 역시 조광조나 정조처럼 현실적인 지저분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다 없애버리고 이상적인, 완전한 평화와 평등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