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만나는 따스한 바위의 문장, 청송(靑松)

백석탄에서 주왕산까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산책기

by 여행하는나무

“날도 추운데,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추운 날, 겨울 여행 간다고 하니 주변에서 말립니다.

하지만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는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제대로 보여주지요. 단단한 줄기와 가지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하게 뻗어있는지,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보이지요. 거기에 눈꽃이 피어나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비록 눈이 없어도, 겨울 여행은 차가운 바람 앞에 굳건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단단한 얼음 밑으로 멈추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때가 있습니다.



유네스코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청송, 겨울의 청송은 담백합니다. 잎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숨겨져 있던 거대한 바위의 골격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알싸할 만큼 차가웠지만, 겨울 햇살은 유난히도 다정했던 날. 그 포근한 빛을 따라 청송의 지질학적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1. 백석탄, 눈부신 겨울 햇살이 머무는 곳

안덕면 고와리 계곡, 잎을 떨군 숲과 작은 마을 사이 눈부신 백색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밝은 색을 띤다 하여 백석탄. 눈이 내리지 않았음에도 계곡은 이미 하얀 보석들로 가득합니다.

기세 좋은 여름의 거센 물살이 잦아든 겨울 계곡은 고요했고, 비워진 틈으로 부드러운 바위에 새겨진 포트홀의 무늬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차가운 흐름 속에서도 햇살을 머금은 하얀 바위는 뾰족하게 각진 데 없이 둥글고 매끄러운 모양새로 주변과 어우러집니다. 백석탄의 매끄럽고 기묘한 구멍들은 오랜 세월 물이 빚어낸 천연 조각품입니다.

얼음을 뚫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바위를 휘감고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자니 켜켜이 쌓여 있는 인고의 시간들이 보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물길 따라 묵묵히 걷기 좋은 길을 짧게 걸어서 아쉬웠습니다.

안덕면 백석탄

2. 신성리, 겨울 볕 아래 선명해진 태고의 산책

신성리 공룡 발자국 공원에 들어서자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움직이며 잡아먹을 듯이 움직여서 순간 놀라기도 했습니다. 넓고 가파른 경사면에 거대한 파충류들이 남긴 삶의 흔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이족 보행을 하는 수각류와 사족 보행을 하는 용각류의 발자국이 섞여 있습니다. 무거운 공룡이 진흙 위를 걸어가며 남긴 자국 위에 퇴적물이 덮여 굳은 뒤, 지각 변동으로 인해 경사지게 솟아오른 것이 특징입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지나간 후 흙이 씻겨 내려가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거대한 공룡이 남긴 삶의 흔적 위로 겨울의 온기가 내려앉는 풍경. 사라진 것들과 남겨진 것들이 교차하는 이 언덕입니다. 1억 년 전, 거대하고 축축한 호숫가였을 테지만 지금은 마른바람만이 스쳐 지나갑니다.


신성리 공룡발자국

멀지 않은 곳에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어 낙엽으로 뒤덮인 산길을 올랐습니다. 둥글게 굽이 돌아가는 강물은 한반도 모양의 둔덕을 남기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물의 힘은 대단하여 때로는 거세게, 때로는 부드럽게 수천 년 수만 년을 굽이굽이 휘어져 흘러가면서 지형을 바꿉니다. 굽이치는 강과 숲이 어우러진 땅, 사람들은 그 땅에 농사를 짓고, 강을 따라 길을 내어 살아갑니다. 계곡을 끼고 강이 휘어 돌아가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이지요.


물길이 만든 한반도 지형


3. 주왕산, 얼음 폭포와 기암의 수직 미학

주왕산의 겨울은 웅장한 수묵화 한 점을 보는 듯합니다.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거대한 암석들과 고개를 치켜들고 찾아야 보이는 주상절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더욱 압도적인 위용을 뽐냅니다. 병풍바위나 급수대는 마치 거대한 신전의 기둥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웅장한 기암괴석은 과거 격렬했던 화산 활동의 산물입니다. 봄이나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겨울만의 고유한 정취가 있습니다. 정적으로 뒤덮인 숲과 높이 솟은 거대 바위들 사이로 이어진 계곡, 겨울에 주왕산을 찾는 사람들은 내면의 고요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청송 대전사와 기암괴석

대전사를 둘러보고 용추계곡까지 걷는 길은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멋진 트래킹 길입니다. 조잘거리는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고요한 침묵 속에 인내하는 겨울 숲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맨발로 걸어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흙길이지요. 기암괴석들 사이 협곡에서 용추폭포를 만나고, 절구폭포와 용연폭포까지 만나러 가는 길에는 햇살이 따뜻하게 함께 합니다. 의연한 결의를 드러내며 한결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폭포를 보며 감탄합니다. 쏟아지는 물줄기 그대로 얼어붙은 절구폭포와 멋진 2단 폭포의 모양새를 계단으로 오르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용연폭포는 그 자체로 장관입니다.


여름내 세차게 쏟아지던 폭포수는 바위 틈새에서 푸른얼음 기둥이 되어 멈춰 서기도 하고, 조금의 온기를 뚫고 아래로 흐르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암석이 먼저 깎여 나가며 생긴 낙차와,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닥을 파내어 만든 둥근 구멍 속에 맑고 차가운 물이 고였다 흘러갑니다. 오늘은 자연이 만든 가장 자연스러운 풍경을 겨울 햇살이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용추폭포, 절구폭포, 용연폭포

4. 꽃돌박물관, 차가운 돌 속에 핀 따스한 온기

꽃돌! 세상에서 가장 시들지 않는 꽃을 보았습니다. 돌에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단단한 돌 속에 아름다운 꽃이 숨어 있습니다.

청송의 보물이라 불리는 '꽃돌'은 구과상 유문암으로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마그마가 식어가는 그 짧은 찰나, 미네랄들이 육각형이나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며 바위 속에 꽃을 피웠습니다. 국화, 해바라기, 장미... 누군가 그려 넣은 듯 선명한 그 무늬들이 사실은 자연의 우연과 필연이 만난 산물이라는 사실이 경이롭습니다.


박물관에서 만난 꽃돌들은 인위적인 조각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무늬입니다. 가장 단단한 바위 속에서 가장 부드러운 꽃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 전문적인 식견과 남다른 심미안이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꽃돌박물관은 남정 김양환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꽃돌과 수석 작품을 기증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그 꽃돌의 아름다움이 무척 독특하고 특별했습니다.

차가운 돌의 심장부에 국화와 장미가 피어날 수 있었던 건, 식어가는 와중에도 끝내 잃지 않았던 뜨거운 열기의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추위와 역경 속에서도 생명은 우리 곁에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에필로그: 겨울 사과 한 입, 대지의 온기를 베어 물다

청송 어디에나 수확을 마친 사과나무들이 보이고, 정갈하게 박스에 담긴 청송 사과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입니다. 청송 사과가 유독 맛있고 단단한 이유는 이곳의 지질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배수가 잘 되는 화산암 토양과 산간 지형의 큰 일교차. 청송의 척박한 듯 단단한 지질 환경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달콤한 열매를 키워냈습니다.


청송 사과나무


청송은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곳이 아니라, 뜨거운 마그마와 흐르는 물이 수억 년 동안 주고받은 대화의 결과물입니다. 신성리 공룡매점에서 넉넉한 인심으로 내어준 사과를 좋은 가격으로 구입했습니다. 단단한 바위의 대지 위에서 자란 사과 한 입을 베어 뭅니다. 아삭한 식감 속에 수억 년의 시간과 청송의 맑은 바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차가운 계절에 더 깊어지는 맛, 그리고 단단한 바위가 건네는 다정한 위로. 청송의 겨울은 그렇게 시리지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Travel Tip] 청송 국가지질공원, 더 깊이 즐기는 방법

청송은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울릉도·독도에 이어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입니다. 알고 보면 더 신비로운 지질 여행을 위한 작은 팁들을 모았습니다.

1. 지형별 관전 포인트 (Geology Guide)

백석탄 포트홀: 물결치듯 하얀 바위들 사이로 깊게 파인 구멍(포트홀)을 찾아보세요. 마치 바위가 숨을 쉬는 구멍처럼 느껴집니다. 흰 바위와 대비되는 짙은 계곡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인생 샷이 완성됩니다.


주왕산 기암괴석: 주왕산 입구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수직으로 갈라진 주상절리가 보입니다. 화산재가 식으며 수축할 때 생기는 규칙적인 틈을 관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신성리 공룡발자국: 해가 비스듬히 비치는 오전이나 늦은 오후에 가보세요. 햇살 덕분에 발자국의 음영이 짙어져서 공룡의 걸음걸이가 훨씬 생생하게 보입니다.



2. 겨울 여행자를 위한 준비물

아이젠과 장갑: 주왕산 폭포 구간은 겨울에 결빙된 구간이 많습니다. 가벼운 등산화와 아이젠을 챙기시면 훨씬 안전하고 여유롭게 절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보온병에 담긴 차: 청송의 겨울바람은 매섭지만 햇살은 따뜻합니다. 벤치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사과를 깎아 먹는 시간은 청송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됩니다.


3. 청송의 맛, 놓치지 마세요

청송 사과 쇼핑: 길가 과수원 직판장에서 구매하는 사과가 가장 신선합니다. 특히 겨울철에는 당도가 최고조에 달한 '부사' 품종을 추천합니다.

사과차와 사과 디저트: 주왕산 인근 카페에서는 청송 사과를 활용한 따뜻한 애플티나 사과 파이를 맛볼 수 있어 여행의 피로를 풀기에 좋습니다.

4. 추천 드라이브 코스

안덕면 백석탄 → 신성리 공룡발자국 → 청송꽃돌박물관 → 주왕산 국립공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동선으로 짜면 청송의 지질학적 변천사를 순서대로 감상하기 좋습니다.)


5. 숙소는 청송자연휴양림을 예약하여 깊고 고요한 겨울 숲에서 완전한 적막을 경험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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