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의 겨울 산행기
겨울에 괴산으로 간다는 건,
높고 아름다운 산을 보러 간다기보다 그 산들이 만들어내는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가깝다. 이번 2월 초, 월화 여행데이의 목적지를 괴산으로 정했다. 시댁과 가까워 여러 번 다녀온 곳이라 낯설지 않고,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자연휴양림 주중 할인 소식까지 더해져 마음이 가벼웠다. 괴산 성불산자연휴양림은 2026년 말까지 주중 숙박요금의 30%를 괴산사랑상품권으로 돌려준다.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환대받는 기분이었다.
첫 날은 충청북도 자연학습원에 차를 세우고 숲길을 걸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 이곳은 화양구곡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평탄한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계곡은 물소리마저 낮춘 채 흐르고 있었고,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길가에 듬직하게 서 있었다. 주말에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10cm 남짓 쌓인 눈 위에 남아 있었지만, 월요일의 숲은 다시 제 자리를 되찾은 듯 고요했다. 학소대까지 걷는 동안 만난 사람은 부부로 보이는 몇 팀뿐이었다.
속리산 일대는 화강암 지대 특유의 커다란 바위 위로 숲이 형성돼 있다. 주봉인 속리산을 중심으로 도명산, 대아산 같은 봉우리들이 군데군데 솟아 있다. 학소대를 바라보며 철제 다리를 건너 도명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화양계곡을 끼고 있는 도명산은 2017년 여름에 한 번 올랐던 산이다. 그때는 땀에 젖어 숨을 몰아쉬며 올랐는데, 오늘은 온 산이 눈에 덮여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젠 없이 오르는 눈산행이 조금 걱정됐지만, 조심해서 걸어보기로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우리의 발자국이 하나씩 더해졌다. 햇살 덕분에 생각보다 춥지 않았고, 낙엽 위에 쌓인 눈은 부드러웠다. 중간중간 얼음이 드러난 구간에서는 발을 고르며 지나갔다. 새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겨울산은 묵묵했다. 바위와 나무와 풀들이 겨울 대지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모습에서, 매서운 계절을 견디는 자연의 인내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았다.가파른 오르막과 짧은 겨울 해가 저물기 전에 내려가기로 했다. 큰 바위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다. 꼭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 길을 걷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눈 덮인 겨울 풍경 속에 잠시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괴산읍내 하나로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보고 성불산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해가 진 뒤 도착한 산림문화휴양관은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다. 두툼한 나무 밥상 두 개가 놓인 방은 숲속 별장 같았다. 5만 원을 결제하고 1만 5천 원을 지역상품권으로 돌려받았다. 하룻밤 3만 5천 원짜리 겨울 숲의 집. 비수기라 그런지 우리 외에 한 팀만 머물고 있어 밤은 깊고 조용했다.
다음 날은 막장봉으로 향했다.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한 이 산은 제수리재에서 시작해 한참을 더 올라야 한다.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아무도 오르지 않은 눈길을 두 사람만의 속도로 만들어 갔다. 남편은 앞서가며 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눈을 쓸어내고 발 디딜 자리를 다져주었다. 숨이 차올라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결국 나는 중간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많이 걸은 것 같았는데 걸음 수를 보니 아직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남편은 잠시 쉬라며 더 높은 곳으로 사진을 찍으러 올라갔다. 나는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등을 기대고 숲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까마귀 소리만 멀리서 간간이 들렸다. 겨울 숲 위로 10cm 넘게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여름에는 피하고 싶던 햇살이 겨울에는 이렇게 포근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양지쪽 눈이 녹아 천천히 땅속으로 스며들고, 그 물은 나무의 뿌리로 향할 것이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숲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진달래가 겨울눈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준비하는 모습이 조용히 힘이 있었다.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자, 내가 나무에 기대 있는 건지 나무가 나를 붙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졌다. 특별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고요했다. 애써 올라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나도 그 일부가 된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은 오를 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을 하나씩 밟으며 내려왔다. 겨울 산행에는 역시 아이젠이 필요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무사히 내려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행의 끝은 괴산읍내 오래된 식당(서울식당)에서 먹은 올갱이 해장국이었다. 단품 메뉴 하나만으로 시간의 맛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올갱이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은 담백했고, 반찬은 조금 짰지만 밥 한 공기를 비우기엔 충분했다. 지역상품권을 쓰고 나니 지갑도 한결 가벼웠다.
1박 2일, 산행 위주의 짧은 일정이었다. 많은 곳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눈산행과 겨울 햇살, 그리고 숲 속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시간들로 충분했다. 겨울의 괴산은 그렇게, 천천히 마음을 정리해 주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