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무시하며 거부하는 이들-마르크스주의자-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일소-하지 않고 보전할 만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인류의 유일한 희망을 찾는다.
이것은 가난이 전적으로 악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은 좋은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는 태도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인민의 아편”이라 칭하는 기독교가 역설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믿음 -가난은 복된 것과 동시에 청산되어야 할 것이라는 믿음-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고통의 문제- C.S 루이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의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스스로 가난한 사람임을 자각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가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임계점입니다. 가난을 한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변화의 필요를 절감하고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Tipping point
Critical point
물이 끓어 터져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임계점은 복음으로 인생을 휘감습니다. 자신의 가난함을, 무력함을 인정하고 “탓”에서 벗어나 원리를 찾게 합니다. 천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가만둘 리 없습니다. “탓”은 가난과 무력의 한을 충동질해 감정에 옮겨 붙게 하고 “증오심”에 불을 지펴 “혁명”의 과업을 완성하자고 외칩니다.
개혁을 부르짖지만 수렁으로 빠지는 원인입니다.
복음은 내면을 깨우지만 선동은 내면을 죽입니다.
“복음” 은 기쁜 소식을 의미하는데 기독교 용어로만 사용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로마는 전쟁 승리의 기쁨을 외치며
“복음”을 외쳤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 사는 우리에게
“승리”의 경험이 절실합니다.
자본주의 저변에 흐르는 생태계의 원리를 깨달아 삶에 적용하면 누구나 흙을 털고 자립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기독 종교를 가진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을 내 삶에서 찾고자 하는 일은 누구나 꿈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은 끝없는 문제 해결의 연속입니다.
잠잠해지려고 하니 최근에 집안에 폭탄이 하나 터져서 수습 중입니다. 제가 그동안 당해왔던 일이 있어 수습하면서 동시에 기회로 바꿔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선동은 복음의 반대편에서 내면을 좀먹는 기생충을
기르는 양식장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올무는 “이대로가 좋다”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무섭기” 때문입니다. 무서워서 그대로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원인입니다.
열심과 노력만으로는 어제에 머무를 뿐입니다.
가보지 않는 무서운 길로 발을 내딛을 수 없습니다.
가난은 청산해야 할 어제까지의 자신입니다.
내면의 청산해야 할 짐이 가난입니다.
“무서움” “증오” “분노” “자기 연민”을 대면하는 순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불처럼 타오릅니다.
그리고 “탓”의 대상을 찾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선동으로 이 감정을 부추겨 역사의 획을 그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망령이 인생들을 부추깁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인생을 갉아먹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쇼를 해대는 일을 보고 있자니 선거가 가깝긴 한 모양입니다. 이번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선동의 매력은 인간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질투” 와 “에고”입니다. 그것을 자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감정에 기대 흔드는 일이 법치의 테두리 안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죠.
가난은 내면의 나의 현실과 마주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가난을 깨닫고 돌이켜 기쁨의 여정을 가기로 역경을 받아들이고 한 걸음씩 전진하면 천국의 길이 보입니다. 주장이 아닌 결과로 책임지려는 자세는 한 걸음씩 전진하며 얻는 기쁨입니다.
복음입니다.
고통스럽고 무섭고 멈추고 싶지만 가보지 않은 길로 내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씩 해결하면 생태계의 원리가 보입니다. 자본주의의 실상은 돈이 굴러가는 원리와 정책을 나에게 맞게 적용하는 연속입니다.
“한 번”의 경험이 삶을 바꿉니다.
그 한 번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한탄의 순간이
나에게 Tipping point가 되어
삶을 뒤집는 Critical point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