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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Oct 26.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합니다 3.

2. 찬양할 때 하나님 앞에선 나를 발견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편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나 자신의 가치와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세상살이가 괴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부했다가는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성공과 경쟁의 문화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러가기를 거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수기 13장 32-33절입니다.


32절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1)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성공과 경쟁의 문화를 무서워하고 그곳에서의 실패 때문에 기독공동체로 숨어서 밖으로 나가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오히려 포기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우성에 합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식에 동화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은

차마 말하지 못합니다. 기독교회는 울타리 안에서 노래를 함께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상처에만 메여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에 바쁩니다. 투쟁이라는 단어를 대결의 도구로만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다양한 손길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갑니다. 

나아가지 않고 머무르기에 타락했다는 비아냥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물을 썩기 마련입니다. 타락했다고 비판하기 전에 울타리를 벗어나는 도전이 우선입니다.

찬양은 바로 도전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하늘로부터의 한줄기 빛입니다.


나 자신의 가치보다 성취의 결과로 평가받는 세계, 그리고 치열하게 경쟁한 후 서열이 매겨지는 상대평가의 세계, 낙오와 실패의 경험을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기준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이끕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 사랑받기 마땅한 존재,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순종하는 삶을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보다 더 소중하게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고라 자손은 시편 84편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문지기라도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소원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 앞에 설 때 나 자신의 가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그가 창조하신 세계 전체보다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기에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아들아 , 딸아. 힘내렴. 너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란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한 걸음 더 나가보자”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간다고 합니다.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람의 인격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악인들에게 인정받고 그들이 제공하는 세상을 위에서 바라보는 승리의 쾌감을 경험하는 것보다 나를 만드신 분의 칭찬과 격려, 인정을 받는 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임을 우리는 찬양할 때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스라엘 자손을 여리고 성벽 앞으로 이끄셨듯 한 발자국 더 세상에 가깝게 이끄십니다. 그곳에서도 찬양하기를 원하시며 완전히 소망이 사라진 땅 조차도 우리가 밟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찬양할 때 하나님 앞에서 기 때문에 우린 깨어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이 예배시간만큼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 절망 가운데 소망을 발견한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죽은 아벨 대신 셋을 얻고,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비로소 죽음에서 생명의 계보가 이어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아벨을 잃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람들에게 원죄를 안겨준 죄인일 뿐이지만 그들은 아벨을 잃은 상처를

극복하고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한 첫 예배자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이방 땅, 부르신 땅, 약속의 땅 그들이 밟았던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울부짖으며 찾았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기 있습니다. 이룬 것도 없고 보잘것도 없고 순종도 못하고 방황하던 제가 비로소 주님을 뵙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천사가 오르내리던 계단을 바라보았습니다. 함께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 가고 싶은 도망자의 마음으로 그곳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 외롭습니다. 도망자가 된 저의 이 초라함이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장자가 될 축복을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형을 속이고 이렇게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홀로 지내는 사막의 밤이 이렇게 춥고 아프고 외로울지 몰랐습니다.” 울부짖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네가 밟는 땅, 내가 함께 한다”는 증거로 천사들의 계단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이 도망자, 노예와 같은 착취의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라헬에게서 발견하고 사랑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길에서 그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경험한 그 능력을 그도 경험했습니다.


듣기만 했던,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그 능력이 나를 찾아옵니다.


이것이 찬양이요, 예배입니다. 내가 서있는 곳, 징검다리이며 지금 이 순간 부르신 땅에서 아픔과 좌절의 뭉개진 가슴을 붙잡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찾는 것. 오직 찬양이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끕니다. 문지기라도 좋으니 함께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은 태곳적 창조자의 마음을 품은 우리가 있을 곳을 찾는 일.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거룩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곁에 있고 싶은 갈망이 삶에 드러난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일, 찬양의 입을 열어 그분을 노래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찬양은 바로 그 하나님을 노래하는 일입니다. 찬양할 때 거룩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가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내가 입을 열어 잘 알지 못해도, 다 알지 못해도 노래를 따라 했을 뿐인데, 옆에 있는 사람 따라 찬송가를 불렀을 뿐인데, 천국이 내 삶에 임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쏟아부으시는 사랑을 경험한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아름답다고 부르십니다. 찬양하기 시작할 때 그 음성이 삶을 휘감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을 그의 앞에서 발견하는 일, 찬양 가운데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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