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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Oct 30. 2019

내가 글을 쓰는 이유-기독교를 만나고 싶다.

난 진짜 기독교를 만나고 싶다.


당신은 왜 개독교라 욕하는가?

진짜 기독교가 어떤지 보고 싶어서는 아닌가?


내가 글 쓰는 이유는 적어도 씨앗수요성경학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꿈을 꾸도록 밭을 갈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만이라도 타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같은 작고 힘없는 청년이

뭘 바꿀수 있겠는가?

뭘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라도

경험과 양심과 말씀에 근거해서 형성된 세계관에

조금이라도 떳떳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고,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


사회를 거룩하게 이끄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욕망의 카르텔을 깨부수러 달려가는 용사들을 길러내는 정의와 공의로 무장된 각 분야의 제자들을 길러내는 기독교를 보고 싶다.


오랜 시간이 걸려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감당해나가는 등불들이 모여

부르신 땅에서 밭을 가는 곳.


그곳이 교회다.

난 그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다.


돌이 떡되게 해 보라는 시험에

한국 기독교회는 무너졌다.

미국의 구호품을 전하는 일을 통해 힘을 얻어

권력의 갈로 갈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힘이 차마 없었다면 어땠을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강력한 도전에 속절없이 무너져 변질되었다.


기독교회의 목사들의 일탈행위와 범법행위가 보도되면 일부의 문제라고 안 그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댓글이 달린다.


과연 일부의 문제일까?

그들이 일탈을 하는 이유의 본질을 살펴보면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산업화 과정을 겪고 군사독제 시절의 부역의 역사 가운데 이익을 맛본 교단과 신대원에 뿌리를 둔다.

그곳이 열정을 식게하고

욕망의 씨앗을 뿌리는 근원지다.


대형 교단과 신대원들은 신학과 목회를 가르치며 동원 숫자가 가진 힘에 대해서 무의식 가운데

계속해서 주입한다.


그것이 곧 힘이고 권력이기 때문에

열정에 타올라 목회를 결심한

목회자 지망생들도 힘 있는 교단의 신대원에 가서

힘 있고 돈을 굴리며 동원 숫자가 많은 교회에서 일하기를 꿈꾼다.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쌓은 실적과 부흥시킨 인원이 커리어가 되고 스펙이 되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들은 크게 성장한 교회의 세미나에

몰리고 크게 되고 싶은 욕망으로

교회 구조를 만든다.


목사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게

힘을 행사하고 싶고 군림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잘 따르는 사람들이 희생양이 된다.


'큰 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가 기도제목이 되고

'부흥해서 자리가 꽉 차고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고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해 주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다해 '총동원주일'에 자리를 채우고

성도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안 맞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 옮긴 곳에서도 윤리를 따지지 않고 대환영이다. 인기 있는 목사와 교회는 엔테테인의 장소가 되어간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구제, 재정 투명성, 예배 스타일, 선교, 건축안 하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메이커들도 있다. 이들은 대형교회 출신이나 선교단체 출신으로 사람들이 어디에 반응하는지 잘 안다.

쟁점화시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나와 교회를 만든다.

타 교회 사람들도 흔들리고 옮겨서 이동한다.


현재 평행이동이 일상인 교회의 현실이다. 무리가 떠나버린 교회는 심각한 후유증과 상처로 가득하다.

문을 닫기도 한다.


치열한 경쟁만 남은 자영업과 다르지 않다.

이슈메이커와 좋은 상품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사람들은 쇼핑하듯 교회를 고른다.


본인의 이상과 가치를 심으려면 혼자 밭을 가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만들면 될 것을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동업자의식마저 없다.

프랜차이즈 교회도 세워 나간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두번 자리를 채우는 맛을 보면 멈출수 없게 된다.


예전에는 성공에 대한 갈망과 계급 상승의 욕구를 부채질해서 사람들을 모았다면,

지금은 과거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젊은이들의

갈망과 욕구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지성인(?)들을

모은다.


재미있는 사실은 공통적으로 '우리 목사님'을

추켜세우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부르심에 대한 개인의 삶에 대한 성찰은 없어지고 교회 내에서의 역할에 대한 담론만이 오간다.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맡은 사명을 어떻게 현실에서 풀어나가야 하는지는 관심없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들은 한데 모여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주동자가

된 것은 덤이다. 그들은 여전히 축복이라 부른다.


제자훈련을 통해 하나의 카테고리로 뭉친 사람들이

봉사하고, 구제하고, 만나서 결혼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는 과정이 반복되며 사람들은 쌓여간다.

은혜와 행복을 추구하며 멋진교회라 자부한다.

멋지다. 부럽기도하다.


그런데 그건 다른 종교와 다를바가 없지않나?라는

내 안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것이 소위 부흥한다는 교회의 현실인데,

80년대의 부역하던 교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목사들이 대부분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들이 속한 교단은 군사독재 시절 정권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성장했다.

지식인 인척, 고고한 척,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는 말만 하며 모른 체 비겁하게 커왔다.


왜 그렇게 크게 목회해놓고

은퇴 후에 목회 방법에 후회를 한다고 하며

예수를 잘 믿으라고 후배들에게 말할까?

양심에 본인들이 거리끼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처음에는 난 겸손하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부르심 받아 모인 백성들을 제자 삼아 세상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워가는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워가는 시민을 배출해야 한다.

어느 영역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느 양심의 소리에 반응하고 살아야 하는지 돕는 곳이 교회다.


오래 걸려도 밭을 갈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가 대한민국에 어떻게 실현되어가며 정사와 권세의 세력은 어떻게 대한민국을 움직이려고 발버둥 치는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 자신만의 역할에 함몰되는 것이 제자가 아니다.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는 역사이며 부르심에 반응하여 밭을 가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선물이며 소망이다.


부르심에 대한 언급은 한국교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일이 부르심으로 잘못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그 함정에 빠졌다.


부르심을 먹고사는 문제와 교회부터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성장해서 커지고자 하는 욕망의 단체였다. 기존 문제를 이슈화해서 지성인들의 자기만족하는 단체였을 뿐이다.


난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로 자랐다.

많은 목사들을 보고 자랐다. 가만히 있으면 대형 교화 차기 담임목사였는데 인맥으로 목회하기 싫다고 연고 없는 서울로 와버린 청렴한(?) 아버지 덕에

가난하게 살았다. 교회가 만든 패러다임 안에서 가치관을 형성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 제일 좋다는 대학에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가슴을 끓게 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었다.


기존 문제들을 해결하며 제자훈련을 기반으로

평신도를 세워 교회의 일원으로 세워가는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제자훈련 세미나를 쫓아다니고 매일 녹음테이프를 들었다.

선교단체에도 소속되어 제자 삼아 선교사 파송하는 과정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도 그들처럼 살기 바랬다. 선교훈련, 예배 훈련은 빠짐없이 받았다.

내 주변은 모두 목사, 선교사, 신대원 교수들이었다.


정말 멋진교회들이었고, 성도들은 열정에 타오르며 다른이들을 섬겼지만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이들에게는 사회를 하나님 나라처럼

변화를 이끌고 싶은 열망이 전혀 없었다.

구성원들을 상처 받거나 주지 않는데만 관심 있고

성경의 진짜 내용에는 관심 없었다.(겉으로야 안 그러지만)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나라는

부르심부터 그들은 거부한다.

안락하고 그들의 강함을 확인할 수 았는 곳을

왜 떠나겠는가? 이해한다.


사회변혁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찬양하고 은혜받고 위로받고 행복하면 그

아니면 뭔가 자신들의 교회만의 다른 시스템을

만드는 정도에 그친다.


왜 그럴까? 도무지 성경에 나와있는 교회는 없고

스타(?)목사들의 기업체만 득실거렸다.


내 눈을 뜨게 만든 책은 두 개다.

"한국전쟁과 기독교"(윤정란, 한울아카데미)

"도전하는 기독교"(마틴 로이드 존스, 복 있는 사람)


내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기독교 체계가 순응하는

체제에 길들게 만들어진 견고한 프레임에 의해

전쟁 이후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것을 주도해서 이끈 주류 기독교가 우리 가정의 신앙의 뿌리라고 여긴 교단과 교회였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풀리지 않던 의문을 해결하는 단서가 되었다.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의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진짜 기독교는 맞서 싸운다는 사실을 알게해 주었다.


두 책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나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이제 갈 길은 정해졌다. 난 고생길에 입문한 것이다.


이후 나는 주류 신대원 진학을 거부하고 학문의 체계와 제자훈련 커리큘럼이 있는 학교에 진학했고,

강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곳에서 난 성경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배웠다. 그리고 말씀을 현재화하는 방식을 배웠다.


돈 때문에 기존 목회 방식에 얽매이기 싫어 일하면서 사역하기 위해 미친 듯 과외를 했다. 과외를 해서 모은 돈, 서울시 공모에 당선되어 받은 돈, 창업투자 대출로 받은 돈을 모아 작은 카페를 열었다.

두 결정 모두 주위에서 엄청 말렸음은 당연하다.


망하지 않으려고 온갖 요리를 만들어보기 위해 재료 사느라 카드를 긁어대며 허덕인 7년의 시간.


어그러진 교회의 구조를 바르게 잡으며 리더십을 세워온 시간.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왜 이슈메이커들이 사람들을 빼내가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교회를 만드는지

이해도 되었다. 그러나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하나님을 농부로 비유했는지 조금은 알 듯하다.


자영업을 하며 생존을 걸고 비겁하지 않게 사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역 구조가 만들어져가고 있다.


교회는 작고 많아서 다양한 사역 방식을 통해 연합해야 한다는 것과 목사도 무조건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다.


노동의 피와 땀은 영혼의 성숙을 선물한다.

영혼의 성숙은 성경의 말씀을 나의 시대에 적용하는 힘과 시선을 풀어낼 용기와 온유함을 허락한다.

기다림을 배울 수 있고, 현실에 뿌리박는 영성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능력도 생긴다.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함을 배우게 된다.


그 감사함이 밭을 가는 힘이다.


감사함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는 말씀의 롤모델로 현재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주심에 너무 감사하고 있다.

목사들 중에는 로이드존스 목사 빼고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모바일로 매일 들어가는 곳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나를 언제나 감동시킨다.

"묵묵히 밭을 갈자. 적은 거대하고 강력하다. 각자의 분야에서 밭을 갈다보면 빛이 보일 것이다."


나도 도전하는 기독교회를 만들고자 했던 꿈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며 밭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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