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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Jan 13. 2020

부르심의 발걸음

오래걸려도 함께 묵묵히 걷는 여정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잘못된 접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이며 스치고 지나간다.


부르심에 눈떠 반응하는 여부의 차이일 뿐,

정죄 넘치는 그 단어에

나도 동참하고 있었음을 뉘우친다.


열정 넘치고, 복음의 깨우침 가운데

날뛰더라도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고,

조용히 부르심에 순종할 수도 있다.

복음의 기쁨이 당장 나를 휘감지 못해도

끝까지 부르심의 땅에서 교회, 직업의 현장,

선교지에서 버티는 사람도 있다.


교회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삶으로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인큐베이터다.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행정) 공의(입법)의

실현을 배운다.


쉽게 말해 돈의 운용과 리더십을 배운다.


돈 없이 교회는 운영은 할 수 없고,

리더십 없이 교회는 움직일 수 없다.

현실에 뿌리박는 영성은 이 두 개를 배우는 과정이다.


누가 누구를 명목상이라 규정하는가?


지금 서있는 땅이 부르신 땅이라 확신하는가?

부르신 땅에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으로

사명을 감당하는가?

부르신 땅으로의 이끄심의 손길을 거부하고

예전에 배운 방식과 큰 건물과 본토 친척, 프로그램들과 활동들, 친구들, 감정으로 충만하게 은혜받은 찬양을 놓을 수 없어 그곳이 부르신 땅이라고 애써 의미 부여하며 서있는가?


당신이 거부하는 그 부르심의 손길을

당신은 알고 있다.

감정, 시선, 평가가 두려워 외면할 뿐이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롯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미묘한 기준 차이가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의 전환이 일어남을

보여준다.


함께 부르심의 여정을 시작했지만,

함께 세상의 기준으로 선택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다른 인생의 결과물을 맛본다.


그러나 누가

아브라함처럼 황무지, 개척의 길을 선택하고 싶겠는가? 그도 남쪽으로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을 좇아갔다가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부르심의 길은 인간의 시선과는 다르고 자연스러운 이끄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롯은 인간으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을 했다.

누가 롯을 비난할 수 있는가?

기름진 찬란한 도시 문명과 부유함을 거절하는 일이

가능한가?


누가 고생하고 싶고, 메마른 땅에 서서

말씀이 이 곳을 기름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버틸 각오를 하겠는가?


벼랑 끝에선 용기를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벼랑 끝에 서지 않는다고, 동원하는 일에 나서지 않는다고 그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는 일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그리고 선택을 존중하시고

부르심 땅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계속 도전하신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황무지, 개척의 길, 벼랑 끝,

친구가 없는 낯선 땅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에 들어선 자에게 본인의 능력 이상의 놀라운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주권으로 하시는 일이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의 능력으로 가능치 못한 일을 어떻게

가능케하시는지 보게 하신다.


본인과 함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하신다


누군가는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누군가는 잠시 발을 들였다가 뺀다.

누군가는 버티다가 힘들어 돌아가기도 한다.


결국 버티고 맛보고 라이프스타일로서 그대로

부르심의 길이 삶이 돼버린 사람들

(세대를 거치면서까지 받아들이는)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대를 이은

기다림 끝에 맛보는 찬란한 일들을 눈으로 보게 된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매우 불편해진 이유이다.

누군가가 화끈한 부르심의 길에 반응하지 못하고

합류하지 못하고 있어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부르심을 감당하고 있다.


폭풍 앞에 열정의 진실됨이 드러난다.


메시지에 반응하고, 함께 뭉치던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 등 돌리고 사라진 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정보다는

조용하고 묵묵한 사람들,

잘 안 움직이고 딱딱한,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남아있다.


참석으로 만족하고

얼굴 한번 비추고 사라지던 사람들이

오히려 태풍이 휘몰아칠 때 끝까지 남아

버팀목이 되어 나의 곁에 여전히 조용히

서있다.


젊음의 열정을 답답한 눈길로 바라보며

팔짱 끼며 바라보던 야속한 모습에 속상했지만

끝까지 내 곁에 서있는 아버지처럼.


최근 몇 년 간 내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독교의 개념들이 완전히 잘못된 동원 메시지였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묵묵히 부르신 땅에

뿌리박아 삶의 부르심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열심히 열정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을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 칭하며 대접(?)했던 것이

사실 아닌가? 교회의 성장에 큰 힘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제자로 불린다.


과연 그들은 제자인가?


오히려 부르심의 길목에서

감정에 휘둘려, 친구들에게 휘둘려

부르신 땅과는 상관없는 땅에서 열정을 소모하며

과로하며 울부짖으며 여전히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는 분명히 정해진 땅(영토)을 근거로 한다.

영토 주권 국민이 나라의 3요소인 점에 주목하자.


그의 나라로의 부르심은 땅에 근거한다.

"너는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이르는 땅으로 가라"


땅은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움트는 근거가 되는 곳인데, 성경은 하나님이 개개인마다 부르신 땅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사도행전 17장 26절)

 

그 부르신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국민이 되어 의무와 권리를 다하며 뿌리 잡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세상 나라와 구별하여 적용하는 곳이 교회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라이프스타일이 되어 기쁨으로 성취하며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의 의가 삶에서 성취될 때, 모든 것을 청지기로서

감당할 일용할 양식으로 매일매일 공급하는 일을 경험한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을 바탕으로 부르신 땅에서

예배하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며 전진한다.

크기와 상관없이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합류한다.


땅이 타락하여 세상 주관자들은 그들의 방식을

라이프스타일로 사는 일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땅에서의 성공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공동체마저 그들은 그 방식에 몰두하도록

타락시켰다. 커지고, 성장하고, 과로하고, 한 곳에만

모이기를 집중하며 블랙홀처럼 다른 땅의 사람들을

흡수하고 삼켜버린다.


세상 주관자들은 땅을 향한

부르심에 대해 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곡간을 가득 채우길 바란다.

커다란 열쇠로 철컥철컥 채워두길 바란다.


땅은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창조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부르심은 반드시 땅에 근거하여 현실에서

꽃 피운다.


생존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집세 때문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 갖춰진 곳에서

빠져나와 부르심의 땅, 직업, 교회를 찾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때론 친구가 없어도, 외로워도, 묵묵히 부르심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 분만이 친구이며 동반자요 공급자임을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대한 통찰력 있는

깨달음을 허락한다.

진리는 나의 빛이 되는 순간을 잊지 못하게 된다.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세상의 성공과 부러움을 쫒던 인생에서 완전히

벗어나 일용할 양식을 부어주심에 감사하며,

평안하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 조금씩 부르심의 길에

합류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무뚝뚝하고 얼굴만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간다.


그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민주시민의 자세와

부르신 영역으로의 직업과 적성으로 밭을 가는 일의

중요성을 배운다.

함께 재정을 만들어 운용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를 세운다.

그리고 또 다른 황무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고

파송을 준비한다.


강남의 아파트, 스타 목사와 큰 교회,

큰 건물의 직장, 자녀들의 학교, 친구들의 의견,

성공의 기준을 쫓던 삶에서 한 번쯤은 시선을 돌려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우리의 삶은 물질에 인생을 던질만큼 가볍지 않다.


나의 삶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과 보내신 땅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보는 일은

내 삶에 주는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돈과 리더십의 문제로 귀결된다.

부르신 땅에서 돈과 리더십을 어떻게 운용하는가를

철저하게 훈련받고 배운다.

오랜기간이 걸려 비로소 부르심의 꽃을 피울

권력과 자리에 올라도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그들이 역사를 바꾼다.

2019, 2020의 시간에 권위의 자리에서

부르심의 길을 오랫동안 기다리며 공의를

입법하기 위해 달려온 리더십들이 나라를 하나둘씩 바꿔가는 모습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성경을 통해 교회에서 돈을 운용하고,

리더십을 익혀 민주시민으로 올바른 가치규범을

삶에 적용해서 열매를 맛보는 일을 주기도문은

일용할 양식이라고 칭한다.


그 일용할 양식은 평안함 가운데 깊은 잠을 선물한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은 궁극의 삶의 진리이다.


나도 당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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