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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Jul 29. 2020

땅을 다스리는 리더십

부르신 땅에서 버티다.(창세기 47장)

땅은 생명의 둥지다.


땅은 사람에게 삶을 유지하고

자손을 퍼트릴 수 있는 생명의 씨앗을 제공한다.

땅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명체는 반드시 땅을 터 잡아 생육하고 번성을

꿈꾼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정복과 전쟁은 기름진 땅을 선점하기 위한 본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는 권력자가 되고, 그 땅의 효율적인 배분을 통해서 리더십과 통치력을 인정받는다.


인정받지 못하면 정권은 뒤바뀌었고,

정통성이 약한 정권은 땅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신들에게 엎드려 빌며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점성술이 발달하고

제사장의 권력이 막강했던 이유다.


창세기 47장은 리더십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강력하게 묘사한 클라이맥스다.


파라오는 자연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땅에 적용하는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여 자산 운용권자로 삼는다. 그 결과 파라오는 식량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제사장의 땅을 제외한 이집트의 모든 땅을 손에 넣었다.


요셉은 땅을 모두 차지한 파라오를 위해 토지법까지 개혁하며 파라오의 리더십을 위한 통치기반을 완벽하게 만들었다.(26절)


찬란한 이집트 문명을 만들어낸 왕국을 몰아낸

힉소스 정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리더십을 요셉을 통해 얻게 되었다.

파라오는 이제 땅의 소유자이며 지배자가 되었다.


백성에게 온전한 통치 리더십을 얻기 위해  본인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통치자의 대리인 앞에 엎드린 것이다. 일개 난민의 수장에 불과한 늙은 야곱에게 축복을 받는 파라오는 하나님 앞에 통치자로서 인정을 받는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파라오의 통치 리더십을

요셉을 통해 만들어주셨는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기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기 위한 땅.

고센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함이다.(27절)


하나님이 통치 리더십과 삶의 터전인 땅을 주시는 이유는 부르신 땅에서 그의 백성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순종으로 부르신 땅에서 씨앗을 뿌리고 거둠으로 인간 존재의 참 기쁨인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 궁극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이방인마저 그의 통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자신을 보이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 한 가지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참된 자신을 찾아 기쁨을 얻는 일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창조 목적을 찾아 진정한 본질의 기쁨을 누리는 것.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부르신 땅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부르신 땅에서 눈물로 순종하며

기쁨으로 단을 거두며 삶의 예배를 하나님을

기다리시고 그 사람을 찾으신다.


반대로 말하면 부름 받은 땅에서

이탈하거나 도망가면 반드시 돌아오게 만든다.

아쉽게도 돌아가라는 많은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알아차려도 돌아가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름답고 기름진 땅이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도시 패권자들이 모두 탐내는

풍요롭고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였다.


이곳을 바라보고 향했던 롯은 먹혀버렸다.


사울은 키 크고 멋진 모두가 흠모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권력에 먹혔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내침을 당했다.

돌아갈 수 있는 신호를 보고도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의 신호를 부정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땅이다.

부르심은 언제나 땅으로 귀결된다. 성경의 인물들은  시대에 따라 각자의 부르신 땅에 대한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누군가는 부르신 땅과 역할을 청지기로서 감당하고 누군가는 도망가거나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하여 파멸에 이르고 만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사울을 향한 사무엘의 안타까움의 외침은

부르신 땅에서의 청지기 역할을 지지층에 대한 인기(지지율 혹은 선거)와 바꾸어버린 인간의 연약함을 행한 절규다.


부르신 땅에서 이탈하는 이유는 사소한 이유가 아니다. 관계의 고통, 리더십의 이해할 수 없는 변덕,

생존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탈한다.


숨 쉴 수 없고, 죽을 것 같고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가족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곳에서는 감동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나도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고 싶다.”

“나도 살고 싶다.”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순종을 불가능하게 한다.


순종은 아쉽게도 하나님의 손길에

내 인생을 맡기고 기다리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부르신 땅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동아줄이 되어 내 삶을 당기실 때까지 기다리는 삶이다.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탈락한다.


감동의 예배를 찾아, 물 흐르는 듯한 관계를 찾아

세련된 공간과 칭송받는, 탁월한 리더십과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만족시키는 조직을 찾아간다.

“부르신 땅이 이렇게 엉망진창 일리가 없어”

“나도 좀 이제 살자”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욕하는 개독교는 부르심을 등지고 떠난 후

찾은 선택과 만족 위에 세워졌다.


세련된 공간과 조직과 활동

세상의 찬사가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멋지고 활기차고 나다워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순종이며 예배일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권력 앞에 사울은 떨며 겸손한 하나님의 종인 듯 보였다. 그러나 권력을 손에 쥐자 그는 그의 권좌를

지키고 그의 세력에게 계승하기 위해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멋진 아말렉의 전리품들로 나의 백성을

만족시켜 리더십을 인정받을 기회다.

왜 하나님은 다 없애라고 하는 거야?”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없어도 완벽한 하나님의 존재를 재화로 멋지게 흉내 낸 인간이 만들어 낸 신으로 격하시켰다. 왕이 될 이유가 사라졌다.


정사와 권세는 바로 이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앉게 하는 것.

하나님을 세상이 섬기는 신들과 같은 존재로

낮춘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부르신 땅을 떠나게만 하면 된다.


개개인에게는 부르신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관계, 재정, 자녀의 문제, 환경을 만든다.

점점 명성을 쌓아 리더십을 인정받는 사람에게는 평판과 인맥, 지지층의 호응을 위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


상황과 환경, 나의 취향에

맞는 사람들과 관계하며 예배하는 일이

너무 당연한 선택 아닌가?


그러나 그 선택을 한 사울에게 사무엘이 말한다.


“당신은 기다려야 했다.

당신은 순종하지 않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성경은 법전이 아니라 삶이 그대로 담겨있는

인생의 기록이다.


내가 경험한 일과 앞으로 경험하게 될 일들이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거대한

하나님 나라와 언약의 성취를 위한 내러티브를 이룬다.


정사와 권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타락과 실패의 방향이 어떻게 준비되어있는지

성경은 말한다. 그 무대는 땅이다.


생명의 땅을 위한 하나님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가 죄로 물든 땅에서도 이루어져 생명이 움트는 터전이 되도록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들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왜 다윗은 적대세력인 사울과 그의 남은 손자를

끝까지 돌보았는가?


정사와 권세는 이 꿈을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항상 바꾸어왔다. 반대편을 철저히 무시하고 숙청하면 나의 정치적 기반 세력이 좋아하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견제세력 없이 국정운영을 할 수 있다. 적대세력끼리 싸움을 붙이면 이득을 보는 이는 결국 권력자다.


다윗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결코 본인의 손으로

판단하며 처단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뜻이 안 보여도

보일 때까지 부르심 땅에서 버티는 것이다.


땅은 순종의 씨앗에서 생명을 움튼다.

그 땅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루어진다.


버티며 온유함을 배우고

그 온유함을 바탕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다윗처럼 예배한다는 것은 감정에 취해

노래하며 방방 뛰며 눈물 흘리는 일이 아니다.

순종의 부르신 땅에서 끝까지 버티는 일이다.


버티면 온유한 인격을 갖추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그 땅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을 맡기신다.

땅과 사람을 함께 다스리는 리더가 된다.


땅을 운용하는 방식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정사와 권세를 통해 얻는 권력을 경외하는지를 보여준다.


기름진 땅은 권력자, 부자들의 소유가 되었고

그 땅은 일자리를 만드는 핵심지기 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노동하며 도시가 만들어지며 인구를 끌어당겨서 가치를 생산하는 기지가 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이 핵심지들은 정치, 경제, 행정수도가 되어 사람들을 통치하는 기능을 발휘하며 국가의 역할은 강해졌다.


핵심지에서 사람들은 향상된 지위와 환경을 원한다.

땅을 향한 욕망은 생육과 번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 기름진 상급지를 위해 일하고 매달린다.

땅을 향한 인간의 본능은 막을 수 없다.


기름진 상급지를 차지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욕망을 힘으로 다스리려고 한다면 리더십은 무너진다.


국가는 법을 토대로 권력자와 부자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그중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가 땅을

재화로 변화시키는 토건 경제분야다.


국토부와 건설회사들은 노동의 대가로 얻은 재화를 바탕으로 땅을 삶의 터전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정치권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움직이는지는

땅을 책임지는 관료와 재벌자본이 바탕이 된 토건의 힘을 어떻게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데에 사용하는지 관찰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땅을 운용하는 방식이 국정운영의 철학을 판가름한다.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데에 땅을 운용하면 시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눈에 보이는 반대편에게 손을 내밀어 협력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지지층은 떨어져 나갈 것이고 같은 진영의 다른 리더십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땅을 향한 청지기의 역할이냐 정사와 권세의 먹잇감이 되느냐가 판가름 난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도 동일하다.


최고의 정치가는 선거에서 이기는 자이다.

그러나 최고의 왕은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이다.


욕망을 이해하고 그 욕망의 근원이 어디인지,

그 욕망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낸 요셉의 파라오와

다윗은 지지층을 대변하는 정치가에서 왕이 되었다.


나는 왕이나 정치가와 같은 능력자가 아니라고?


다르지 않다.

같다.


부르신 땅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아니 우린 알고 있다.

도망쳤거나 도망치고 싶을 뿐.


순종의 길에 왕이든 초라해 보이는 나의 삶이든

구분이 없다. 어느 땅에 서있어야 할지 당신의 마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고통스럽고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그곳에서의 눈물을 그는 기억하신다.

그 눈물이 우리를 예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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