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다니는데 대기업 직원답지 않은 UX 디자이너 이지현
안녕하세요. 저는 10,000명 이상의 임직원이 근무하는 대기업을 첫 직장으로 선택해,
3년하고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UX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이지현입니다.
취준생 시절, 첫 회사를 선택할 땐 '모두가 알만한 회사인가’, ‘나와 맞는 직무인가’, ‘졸업하자마자 취업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찾아다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최근 들어 이제 이 일에 조금 잡히고, 대기업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게 나와 맞을까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스스로 정리했던 대기업의 장단점과 제 생각들을 공유하며, 첫 회사 선택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준비해 보았어요.
사실 연봉이나 복지의 매력은 채 1년이 가지 않는 것 같아요. 있으면 분명히 좋겠지만, 이것을 위해 회사를 열심히 다닐 수 있나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거에요. 그럼 연봉, 복지빼고 제가 얻을 수 있었던 대기업의 장점은 무엇 일까요?
장점 1.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멋진 선배와 동료
우리 회사엔 저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약 160명 정도 있어요. 함께 일하다 보면 똑같은 디자이너일지라도 각자의 스타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 부러지게 이유를 물으며 맞서 싸우는 사람, 어느 정도 수용하며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아 빠르게 실행하는 사람, 잡일은 후다닥 해결해버리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만 함께 상의하는 사람, 작은 일도 공유하며 모두 함께 헤쳐나가는 사람 등 다양한 스타일의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정답은 없어요. 그저 나와 가치관이 맞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에 대해서 나도 이런 상황에선 저 분 처럼 행동해야지하며 습득해왔으며, 나중엔 나의 롤모델로 삼고 싶은 분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령 A라는 디자이너를 나의 롤모델로 삼게 되었다고 해보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스스로를 A에 빙의하여 A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거야 하고 판단의 기준을 삼을 수 있어요. 이것은 쪼렙 디자이너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가장 가까이에서 같지만 다른 디자이너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히 신입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 정말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나 싶어요.
장점 2. 신입이니까 괜찮아, 실수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
사실 대기업은 이미 안정적인 수익원과 오랜 기간 체계적으로 잡혀온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입사원 한명의 잘못 혹은 실수로 인해 회사가 타격을 입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입사하자 마자 담당 선배와 밀착하여 일을 배울 수 있게 되는데요. 이런 명확한 선후배 시스템 안에서 후배의 실수는 대부분 선배 혹은 상사의 책임이 됩니다. 막말로, 내가 못해도 회사는 굴러가니까 무거운 부담감은 내려놓고 얼마든지 실수하면서 배울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마냥 망나니(?)처럼 놀면서 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매년 연봉을 결정짓는 평가 시스템도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적당히가 좋겠죠?
장점 3.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는 환경
종종 다른 회사 친구들이 "그 회사 분위기 어때?"라고 물으면 "부바부"라고 대답하는데요. "부서 by 부서"의 줄임말로 구성원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같은 회사 내에서도 부서마다 분위기나 업무 스타일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에서 입니다. 동일한 디자인 직군 내에서도 맡고 있는 일이 정말 다양한데, 저는 협업용 메신저 서비스를 디자인하며 어떻게하면 임직원들이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바로 옆에서 물류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디자이너는 선적이 해적에게 약탈당했을 때 어떻게 알림을 줄 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회사 외부 사람들과 일할 기회도 많은데요. 스타트업과 협업하여 새로운 유즈 케이스를 발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땐 그들의 추진력과 자신감에 자극받았고, 최근에는 인도 디자이너와 개발자들과 함께 프로젝트 중인데 시차, 문화, 업무방식 모든 것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하며 일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며 노력 중인데요. 글로벌 역량이라는 게, 조금 더 다양한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는 것을 무한 깨닫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처럼 한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양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협업하며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장점이 있어요!
하지만 이런 대기업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에요. 대규모 인력이 함께 일하는 만큼 힘든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단점 1. 내부적으로 설득해야 될 무수한 사람들로 인한 느린 의사결정 과정
저희 회사는 10,000명이 넘는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보니 1명의 CEO가 모든 인력을 매니징 할 수 없습니다. 그럼 CEO는 본인의 권한을 몇몇 책임자에게 위임하고, 또 그 책임자 역시 다른 책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피라미드형 직급 구조가 형성됩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한 가지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선 각 책임자 모두를 거치며 의사결정(흔히 ‘보고’라고 불리는)을 받아야 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일정이 지연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실무진들은 내부 의사결정을 빠르게 통과하고자 고객 중심의 사고 보다는, 보고받는 상사의 경험을 고려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끔 나는 과연 User Experience Designer인가 Boss Experience Designer인가 생각이 들며 씁쓸해지기도 하는..)
단점 2. 관리 또 관리
대규모 인력이 한 회사에 있다 보니, 다소 보수적으로 통제된 시스템 속에서 업무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내 보안 유출을 막기 위해 사내에서 외부 사이트 진입이나 스마트폰 카메라 사용이 엄격히 통제됩니다. 덕분에 벤치마킹도 마음대로 하기 힘든..ㅎ 최근 해외 출장을 다녀왔는데, 출장 관련 결재 요청만 꼬박 하루가 걸렸던 것 같아요. 소규모로 바로 옆에서 체크할 수 없다보니, 시스템화되어 기록되고 제한된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실무진 입장에선 부가적인 태스크가 동반되어야 하다보니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경우가 많고, 때때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더 잘할 수 있는 환경 보다는, 일을 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커버할 지에 대해 포커싱된 시스템이 아쉽기도 합니다.
사실 앞서 말한 장단점은 오로지 제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린 부분이라, 사람마다 제가 말한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보고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선배와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그 선배는 그런 꽉 막힌 사람들을 설득하고 깨부수어 나갈때 희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 재미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정말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다만, 첫 회사 선택에 앞서 ‘기업의 규모나 성숙도’도 나와 맞는 회사를 찾기 위한 꽤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론 ‘첫 회사’일 뿐 평생 직장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어디든 한 번 부딪혀보고 시도하며 나와 맞는 곳을 찾아가도 좋은 것 같아요. 어딜 가서든 ‘배울 점’이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