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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ul 11. 2020

나를 가두는 것들

내가 연애를 할 수 없었던 이유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지 않기 때문이에요



과거의 연애에 대한 상처로 새로운 시작을 주저하길 3년쯤 반복했을 때,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연애 칼럼니스트 분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과거의 연애사와 내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그분에게 처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정의’가 뭔지 아세요?”


나는 의아해했다.

“연애 상담하는데 ‘정의’는 왜 묻는 거지?”


그렇게 벙쪄버린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의는  있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리고 규정한 것들이에요.”


당신이 연애를 못하는 이유는 연애에 앞서 당신이 상대방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 때문이에요.

얘기를 들어보면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니라 할 생각이 없는 거 같아요. 내가 지난날들에 받은 상처를 처음 만나거나 새로 시작할 누군가에게 프레임을 씌워 “쟤도 저러겠지”라고 생각하시잖아요.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짐작해서 판단하는 거 그거 나쁜 거예요.”

쇠망치로 뒤통수를 씨게 때려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기준들로 수많은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들이 지켜져야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음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내가 힘이 있거나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심지어 내가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의했다는 사실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누군가를 만나며 맺고 끊으며 했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들은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상대를 정의 내리고, 판단하여 단정 지었던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와...” 내 머릿속은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후 다음날까지 정지상태였다.

“좁디좁은 독방을 만들고 스스로를 가둔 채 독방 속 작은 창문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스스로의 삶도 완벽하게 살아내지 못하는 하찮은 내가, 같잖은 경험 하나를 내세워 상대방에게 완벽을 추구하며 살고 있었단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다시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내 모든 것이 틀렸고, 틀렸단 사실을 모두 인정한 순간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았다.


3년의 공백기를 가지며 연애는 더 이상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난, 그 날 이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연애와 함께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항상 가지고 있던 ‘좋은 사람’을 만나 ‘완벽한 연애’를 해야겠다는 강박, 그 강박을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저 내가 겪은 한 사람은 그 한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것,

다양한 사람들을 겪고, 사람에 대한 어떠한 평가와 판단을 하기보다 그저 다른 사람으로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날의 짧은 대화 이후로 내 삶은 연애뿐만 아니라,

관계에 있어 불안을 대하는 태도 또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정체되었다고 느끼거나 불안을 맞이할 때, 나라는 사람이 정의한 상황은 없는지, 누군가로부터 정의된 무언가에 목을 매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정의를 지양할 때 비로소 관계의 스트레스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은 정의하는 순간 정체되고, 재정의 하는 순간 다시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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