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치열하다.
소주 한 잔 해야지?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술자리가 늘어났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부모님과 함께 앉아 짜증을 내던 화를 내던 서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부모님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억누르려 해도 습관처럼 말하곤 하신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은 어느덧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난 열심히 살아야 하고, 잘 살아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고, 내 뜻과 다르게 삶이 흘러가긴 했지만 난 그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스물아홉의 여름, 그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함께 술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말씀하셨다.
시련 없는 삶이 어딨겠냐
비록 시련의 크기, 모습은 다 다르겠지만
다른 크기, 모습의 시련만큼
성장하는 정도와 모습도 다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은 모나지 않게 산다면
다 잘 살아갈 수 있게 되어있어
그렇기 때문에
계속 앞으로 걸어야 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다면
네 삶도 어느새 올라설 거야.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남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나를 보는 마음도 이해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생각했다.
그만 걸으려고요, 잠시 멈춰서 쉬고 싶어요.
어떻게 살 거냐고, 묻지도 말아 주세요.
난 지금 너무 힘들고
다시 걷고 싶을 때, 그때 걸을래요.
잘되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론적 사고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서 내 과정은 무색해지고, 내가 살아온 열심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런 시간 속에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애매하게 공존하는 삶, ‘나'라는 사람이 살아내기 위해선 내가 원하는 길을 걷는 연습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원치 않은 걸음 속 원하는 삶을 얻을 수는 없으니까 날 믿는다면 그냥 지켜봐 주면 좋겠어요.
그게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게 한심해 보이더라도
그때 비로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애써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켰다.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았고, 어느 시점부터는 굳이 내 삶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나를 믿어주길 바랬지, 내가 믿으려 노력한 적은 없었기에 내 나름의 길을 만들다 보면 부모님이 자연스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내가 믿기로 했다.
그게 늦더라도 비로소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난 스물여섯의 그 날을 기억한다.
아버지와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며, “어떻게 살거니”가 아닌 “넌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살게 되었니”라며 내 삶에 대해 물었을 때, 그 날은 아버지로 하여금 내가 가장 행복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열심히 살고 싶은 내 삶의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의 모습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이 되고 싶은 사람인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관심이 만들어간다는 것을 나는 어느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