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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Sep 22. 2024

사춘기? 엄마도 자립할래

아이와 잘 헤어지기 위한 엄마의 맵고 짠 자립투쟁기


큰 아이가 12살이 되었다. 아침마다 키가 자라 있고, 동물 같던 눈빛에 깊이가 생겼으며, 건네는 말 한마디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나의 도움을 원치 않는다. 이 가을이 지나면 13살, 본격적인 청소년의 세계로 들어갈 아이.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시련이었던 아이가 인생의 '봄'인 사춘기를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슬며시 내 마음속에서도 어떤 설렘이 고개를 든다. 아, 어쩌면 내게도 제2의 봄이 찾아오려나?



호시탐탐 노려오던 엄마의 자립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느 엄마사람처럼 아이들의 건강, 교육, 정서, 진로에 대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결국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보고 싶은 친구들도 덜 만나며 오로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쓸 최대한의 힘을 비축했다. 지금 와선 뭐 하러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몰입했을까 싶지만 뭐 하나에 꽂히면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


아이들과 나는 모든 지성이 잠똥밥으로 대체되던 짐승의 시간을 지나, 자연 속에서 멈추지 않는 모험심으로 세상을 탐색하던 유아기, 폭발하는 지적 호기심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던 아동기, 이제는 나라는 울타리를 깨고 나가려고 하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내 이름을 잃고 아이들을 얻은 10년이었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 아이들은 생의 매 순간 언제나 나에게 기쁨과 가르침을 주었고, 지난 10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테니 다시 인생을 산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만 언제나 마음 한편에는 그 10년을 나를 위해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기회비용에 대한 계산과 이름 석자가 사라진 채 보호자로 남은 자신대한 연민이 남는다.


그래서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었던 무렵 어느 날부터 조금씩 시간이 날 때마다 내 이름을 되찾아가려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의 학교 행사, 집안의 대소사, 식구의 질병 등에 밀려 어느덧 또 작심삼일이 되어 볼품없이 사그라지기 일쑤였다.


아이들과 가족들은 나에게서 변함없이 충실한 엄마를 필요로 했고 나는 또 군말 없이 나로부터 엄마사람을 소환해 멋지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행복했다. 그냥 이렇게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자립에 대한 간절함 없이 시도했다 포기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여자에게 자립이란 헛수고라는 자포자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데.  copyright 2024. 김보령. All rights reserved.




사춘기는 엄마 자립의 절호의 기회



그런데! 내 아이가 사춘기가 되었다. 지금도 엄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래서 나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나를 가둬왔는데, 울타리의 한쪽 면을 허물며 아이가 먼저 뛰쳐나가려고 한다. 드디어 내게도 엄마사람을 탈출할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인력과 관성에 의해 지구를 맴도는 달처럼 나는 쉽게 울타리를 떨치고 나갈 수가 없다. 이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를 써왔는데, 그간의 모든 희로애락과 추억이 이 울타리 안에 있는데, 무엇보다 나는 그동안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준비가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은데 과연 뛰쳐나갈 수 있을까?


주름진 내 손등을 바라보니 더욱더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아이의 사춘기는 분명 엄마가 자립을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동안 절대적인 분량의 시간이 허용된다. 이 황금 같은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좋을까?


내가 생각하는 육아의 최종 목적은 자녀의 독립이다. 자식은 우리집에 찾아온 귀한 손님이라는 말처럼, 아이와 함께하는 20년은 결국 서로가 잘 헤어지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사춘기는 그 목적지로 가는 첫 관문이자 시험대이고 부모는 아이를 기꺼이 놓아주어야 아이가 충분히 자신을 독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품 안의 자식을 살뜰히 보살피던 모성의 관성이 급격한 커브길을 순탄하게 돌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식은 어쨌거나 자식이니까 그 커브길에서는 어쩌면 맵고 짠 투쟁 같은 자립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생이 100년이라면 아직 반이나 더 남았다.  copyright 2024. 김보령. All rights reserved.




K엄마의 맵고 짠 자립투쟁기



엄마의 자립을 준비하기에는 본인의 의지뿐 아니라 주변 구성원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격려보다는 걱정이 많다. 이 또한 사회적 인식의 관성 탓이다.


"집에서 자식, 남편 잘 돌보는 게 돈 버는 일이란다."

"지금까지 잘 해왔으면서 왜 갑자기 돈을 벌겠다고 이러는 거야?"

"나이 들어선 그냥 남편 주는 돈으로 살지, 왜 사서 고생하려 그러니."

"아내가 집에서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 아이들과 남편이 마음 편하게 공부하고 일할 수 있어."

"엄마(당신, 딸, 며늘이, 누나, 언니) 없으면 우리 어떻게 해!"


한 마디로 하던 대로 엄마 역할에 충실하며 살라는 조언들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는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과 여성의 사회성을 한정하는 풍조들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자립을 이루려는 K엄마들의 발목을 잡는다. 사회적 허들을 뛰어넘고 자신이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자립을 이룬다는 것은 정말 실존적인 투쟁에 가깝다.


그래서 여성의 자립은 자식의 독립보다 어렵다. 누군가를 여전히 책임지고 독립할 때까지 양육시켜야 하면서도 스스로를 성장시켜 심리적, 경제적 독립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순한 육아보다 더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외로운 싸움이 될지라도.  copyright 2024. 김보령. All rights reserved.




10년 뒤, 엄마를 사직합니다



나는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0년 뒤 어느 날을 완전한 자립의 첫날로 잡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사춘기를 내 자립을 위한 준비의 첫 시작으로 삼는다. 앞으로의  10년은 실력칼을 가는 와신상담의 세월이 되고, 이 글은 출사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나는 이곳에 맵고 자립 투쟁기를 남기려고 한다. 자식도 살고 나도 살릴 수 있는 투쟁 같은 자립기를. 10년이라니 호흡이 너무 길지만 그만큼 내 투쟁은 날카롭게 벼려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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