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과 내 논리가 먼저입니다.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소감으로 한 이 말을 메이커분들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미 유명해서 많이 알고 있는 명언이지만, 아는 것과 체화되어 있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체화는 반복적인 적용을 통해 이뤄집니다. 스토리 작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에 어떤 가치를 생성하시는 분들(크라우드펀딩뿐 아니라 사업을 하시는 모든 대표님들)이 모두 이 명언을 체화했으면 합니다.
가끔 본인이 작성한 스토리를 먼저 봐달라며, 저에게 스토리 초안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스터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스토리는 저 역시 판단의 기준이 없습니다. 이럴 때 제가 하는 일이, 스토리를 읽고 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상상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앞쪽에 공감할 수 있는 경험담 같은걸 써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설이 지루하고 다 아는 내용이면 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한 스토리를 다 읽은 후, '이 분은 이런 걸 되게 중시하는 분이구나' 정도가 떠오르면 저는 좋은 스토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글들을 통해 우리가 상대할 대중 투자자들과 다른 메이커들에 대해 공부했다면,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정리해볼 차례입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전하는 핵심 가치는 이거다!' 하고 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제품 자랑을 아무 두서없이 쭈욱 나열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인간이 삶의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규정해가듯, 자신이 긴 시간을 들여 만든 제품의 각 요소요소들은 모두 자신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제품의 디자인, 핵심 기능, 소재, 사용방법, 사용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 등 투자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용을 모두 빠짐없이 작성합니다.
요소들을 모두 나열한 후에는, 이전에 정리해둔 대중 투자자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 문제'들을 다시 꺼내옵니다. 우리의 제품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많은 요소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무엇일까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재정의해본다면 어떤 문장이 나올까요? 이런 생각들이 충분히 숙성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스토리(추후 작성할 일반몰의 상세페이지까지)를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가까워진 스토리가 가장 창의적인 스토리입니다. 어떤 인간도, 남과 똑같이 생각하는 법은 알지 못합니다.
레퍼런스를 찾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잘된 사례들을 먼저 보고, 그걸 모방해 내 제품을 포장하다 보면 읽는 내내 힘이 빠지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와디즈에 큰 펀딩 기록이 세워지고, 이를 모방해 우후죽순 나타나는 비슷한 형식과 디자인의 스토리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합격 사례들을 참고해 작성한 취업용 자기소개서가 힘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말과, 내 생각, 내 논리가 먼저입니다. 바빠서 생략 가능한 게 아니라, 바빠도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