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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4. 2023

잃어버린 사진들

생애 첫 카메라는 필름카메라였다. 한 손에 딱 잡히는 작은 카메라는 휴대성이 뛰어났지만,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필름 때문이었다. 24장 혹은 36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은 부담스러운 품목이었다. 한 푼이 아쉬운 학생에겐 더욱 그랬다. 특별한 날에만 쓸 수 있었던 카메라를 들고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서 최대한 많은 양의 필름을 구입했다. 현지에서 사면 더 비싸다는 말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탓이었다. 


경유까지 포함해서 거의 하루 만에 도착한 유럽은 내가 살아왔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지구 반대편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지리적인 부분만 포함하는 게 아니었다. 자연 환경은 물론 거리의 모습도 달랐다. 사방은 온통 알 수 없는 문자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와 자극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황홀함과 부러움과 충격이 범벅된 상태로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셔터를 누르다 보면 어느새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넉넉하게 챙겨왔다고 믿었던 필름은 야속할 정도로 빨리 줄어들었다. 가는 곳마다 필름 파는 곳이 있었지만 가격장벽을 뛰어넘긴 어려웠다. 아쉬워도 아껴 쓰는 전략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정에 억지로 맞춰서 찍은 필름들은 여행 마지막 날, 배낭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짐을 부친 뒤 홀가분하게 비행기에 올랐고, 열 몇 시간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부스스한 몰골로 짐을 찾으러 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내 배낭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의 짐이 다 나오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가방들까지 모두 주인을 찾아갔지만 내 배낭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았으나 뭐가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저기 연락해보던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짐이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배낭이 어떻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비행 경험 자체가 적었던 탓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아예 몰랐던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눈치를 살피던 직원은 배낭이 다른 비행기에 실린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상황이 납득되진 않았지만 짐을 찾는 게 급했기 때문에 배낭의 현재 위치를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도 추적을 해봐야 합니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물건들은 없어져도 상관없었다. 다시 살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필름은 달랐다. 어설펐던 첫 여행의 순간들과 함께 여행한 친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필름의 가치는 환산이 불가했다. 내 추억은 물론 친구들의 추억까지 몽땅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현실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머릿속까지 울렁거리도록 내버려둘 순 없었다. 흐트러진 정신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배낭의 크기와 모양과 색상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열심히 받아 적던 직원은 네임택이 있는지, 정확한 주소는 적혀 있는지 등등을 확인했다.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받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잃어버렸던 배낭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도착했다. 꼬질꼬질한 표면에는 항공사 바코드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러 나라를 돌고 도느라 거지꼴이 되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온 것이 그저 갸륵했다. 엉망이 된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멀쩡했다. 없어진 것도 없었고 깨진 것도 없었다. 가장 감격스러웠던 건 필름을 되찾은 일이었다.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필름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앞으로 다시는 짐으로 부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스물아홉의 어느 날, 두 번째 사직서를 내고 두 번째 인도여행을 떠났다. 당시엔 이미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전기만 챙기면 카메라와 관련해선 일절 신경 쓸 게 없었다. 준비 단계부터 수월했던 터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만 같았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빠진 채로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고, 새콤달콤한 김칫국에 취해 제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메모리 용량이 무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배터리를 충전하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메모리 확인은 뒷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찍기만 했더니 여행을 시작한지 보름도 되지 않아 메모리가 꽉 채워지고 말았다. 카드 잔량이 부족하다는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남은 일정을 위해 사진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간신히 찾아낸 작은 사진관에서 메모리의 사진들을 CD로 옮겼다. 한 장도 빠짐없이 다 옮겨졌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따끈따끈한 열기가 남아 있는 CD를 배낭 주머니에 넣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짐을 풀었고,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짐을 쌌다. CD는 굳이 꺼내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 넣어둔 곳에 그대로 두었다. 초창기엔 배낭을 열 때마다 CD가 잘 있는지 습관적으로 확인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확인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무감각한 상태로 지내다가 다시 사진이 생각난 건 일정의 중반부를 넘겼을 때였다. 지퍼를 열고 들여다본 주머니 안에는 CD가 없었다.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CD만 사라졌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주머니가 아니었나? 착각이길 바라면서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건들을 다 꺼내보고 배낭을 뒤집어서 털어보기까지 했는데도 CD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 떨어뜨린 걸까. 어딘가에 두고 온 걸까. 혹시 누가 훔쳐간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두고 왔다면 다시 찾으러 가면 되지만,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발을 동동 구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추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타격이 어찌나 컸던지 여행에 대한 의욕이 싸늘하게 식어버릴 정도였다. 남은 일정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속이 뒤틀렸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다가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미리 구입해 놓은 비싼 기차표 때문이었다. 쾌적하게 가고 싶어서 큰맘 먹고 예매한 표를 그냥 썩힐 수는 없었다. 멀쩡한 표를 날려버리면 나중에 더 억울해질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뉴델리역에서 암리차르행 기차에 올랐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게 만드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마련인데, 다행스럽게도 암리차르는 여행자에게 적당히 무심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밀린 빨래를 하고, 동네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고, 황금사원을 둘러보고, 골목을 배회하고, 다른 여행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마음을 점령했던 뾰족한 가시들이 조금씩 떨어져나갔다. 


여행 중에는 늘 일기를 썼기 때문에 암리차르에 머무는 동안에도 매일 밤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했다. 깨알 같은 글씨들로 채워진 일기장을 쭉 훑어보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도대체 뭘 이렇게 많이 썼을까.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는 동안 별의별 내용이 다 적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걸 왜 썼을까’부터 ‘이런 것까지 써놓았다니’까지, 그야말로 온갖 세세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키득키득 웃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볼 수 있는 과거는 사라졌지만 읽을 수 있는 과거는 오롯이 남아 있었구나.


암리차르를 떠나기 전, 잃어버린 사진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나간 것에 연연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홀가분하게 버스에 오르자 식었던 의욕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중이었고, 또 다른 낯섦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메모리를 채워나가는 새로운 사진들을 보면서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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