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을 방문했을 때 처음 마주한 것은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 충격이 아니었다. 시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인지되는 외모의 차이였다. 나의 생활 반경 안에서 가끔 다른 인종을 보는 것과 다른 인종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관광객이 차고 넘치는 런던 거리는 전 세계 인종을 모아놓은 장소였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누군가가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매 순간 당황했던 이유는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미의 기준은 정형화되어 있었다. 일단 눈이 커야했고 코는 오뚝해야 했으며 얼굴은 갸름해야 했다. 광대가 튀어나왔거나 턱뼈가 크거나 눈이 작거나 코가 낮으면 개성 있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미남미녀 대열에 합류하긴 어려웠다.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외모는 서구적인 외모에 가까웠다. 한국인에게 왜 그런 기준을 적용하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미의 기준을 제시하는 지분의 대부분을 미디어가 갖고 있던 탓에 의문을 제기할 기회 따윈 없었다. 나의 생각이나 취향과는 상관없이 뛰어난 외모의 기준은 정해져 있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기본 값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입체적인 얼굴은 희소했다. 그러나 런던에선 흔했다. 이쪽을 보면 날렵하게 뻗어 있는 콧날이 있었고, 저쪽을 보면 그림자가 드리워진 깊은 눈매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는 영롱한 구슬 같은 눈동자가 있었고, 먼 곳에는 윤곽선이 도드라지는 앞 광대와 각진 턱이 있었다. 선이 뚜렷하면 샤프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십대의 나는 샤프한 느낌을 매우 선호했던 터라 길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잘생겨 보였다. 순정만화에 나오는 조각미남은 상상의 인물도, 허구의 인물도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주 흔하게.
런던은 유럽 여행의 출발점이었다. 남은 여행에 대한 기대치는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보이던 조각미남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들었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나중엔 국가별 차이라고 결론지었다. 유럽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었고, 나라마다 스타일도 달랐으니까.
어느 나라를 가던지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았다. 샤프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뭔가 달라지고 있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던 얼굴들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구분하지 못했던 내 눈은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차이를 인식했다. 선의 굵기와 모양은 제각각이었고, 굴곡의 높낮이도 천차만별이었다. 똑같은 갈색머리는 하나도 없었으며, 푸른 눈이라 부를 수 있는 범위는 꽤 넓었다.
여행 막바지에 접어들자 이국적인 외모는 더 이상 근사해 보이지 않았다. 끌렸던 이유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특별했던 이유는 낯설기 때문이었다. 선이 분명한 얼굴들은 흔했다. 흔한 것은 평범했다. 평범한 것이 시선을 사로잡긴 어려웠다.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편안해졌다. 그 대가로 내어준 것은 감흥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조각이었지만, 모두가 미남은 아니었다. 조각과 미남은 세트가 아니었다. 두 단어를 함께 쓸 수 있는 경우는 어느 나라에서든 드문 일이었다.
이듬해에 다시 런던을 방문했을 땐 모든 것이 예전과 달랐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지만 조각미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간혹 눈에 띄는 외모도 있었으나 처음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뚜렷하다는 것이 보기 좋은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박물관에서 그들의 생김새를 닮은 조각들을 보는 동안, 조각 같다는 말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조각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내 얼굴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면, 세상은 분명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조각처럼 생겼네.”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기 좋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의 기준이라는 건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쌓여간다는 것은 취향이 만들어지거나 혹은 변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취향이 달라지면 미적인 관점도 달라졌다. 매력은 외모와 비례하지 않았다. 개성 없는 아름다움엔 더 이상 끌리지 않았다. 조각미남이 사라진 거리에서 깨달았다. 강제로 주입된 정형화된 미의 기준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어떤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 대상 자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