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반경이 좁은 어린아이에게 열차는 바깥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흥미진진했던 것은 열차 내부를 채운 군상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지만 젊은 여행자들만큼 눈길이 갔던 존재는 없었다. 크고 작은 짐 꾸러미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배낭 하나만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간혹 기타를 메고 온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의 짐은 더 적었다.
어린 나의 눈에도 그들은 뭔가 달라보였다. 우리는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창밖으로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해사한 옆모습은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입석을 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서서 가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편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마저 근사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빽빽한 열차 안에서 유일하게 낭만적인 여행을 하고 있던 그들은 ‘청춘’과 ‘열차’와 ‘낭만’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어놓았다. 앞뒤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는 열차 칸처럼.
우리나라의 면적은 밤새도록 달려가야 할 정도로 넓지 않았고, 그마저도 섬이나 다름없는 상태이다 보니 야간열차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럽은 달랐다. 여러 나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곳에선 육로로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푸릇푸릇한 청춘을 살고 있던 나에게 열차 여행은 마땅히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그 의례를 유럽에서 치르게 되었다는 감격에 젖은 채로 어둠이 깔린 플랫폼에 섰을 때,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낭만적인 여행의 서곡에 전율했다. 내가 드디어 진짜 여행자가 되었구나!
암스테르담을 출발한 열차는 다음날 뮌헨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열차에서 밤을 보내고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잠이 깨어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광경을 감상하리라는 소박한 계획을 품고 올라탄 열차는 좁고 덥고 지저분했다. 화장실 수도꼭지에선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유럽은 선진국들의 집합체였다. 선진국이라면 응당 잘 갖추어진 시스템이 있어야 했다. 거기엔 깨끗함과 편리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탄 야간열차에선 기대했던 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색찬란했던 희열감이 바짝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투척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검정색 잉크를 왈칵 쏟아 부은 풍경뿐이었다. 소음과 진동은 거슬렸고, 낯선 사람들과의 부대낌은 거북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불쾌한 불면의 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좌석이었다. 누워서 갔다면 분명 야간열차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을 터였다. 한 번의 경험으로 곱게 쌓아올린 환상을 무너뜨릴 순 없었기에 객실 밖 통로를 배회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번엔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 원래 처음은 워밍업이잖아?
이후에 탄 야간열차들도 노후화의 정도만 다를 뿐,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세 명씩 마주보고 앉는 구조로 만들어진 6인실 컴파트먼트는 숙박료를 아낄 수 있다는 점만 빼면 장점으로 꼽을 만한 게 없었다. 난생 처음 경험해 본 허리 통증은 꽤나 고통스러웠고, 잠을 잘 수 없는 밤은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한밤중에 장총을 멘 군인들이 올라와 열차를 수색하는가 하면, 꼭두새벽에 들이닥친 역무원이 추가 운임을 내라고 닦달한 적도 있었다.
가장 황당했던 경우는 파업으로 인해 열차운행이 중단됐을 때였다. 예약한 열차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탑승 직전에야 알게 된 탓에 달리 방도가 없었던 L과 M과 나는 어쩔 수 없이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까지 가는 열차를 탔다. 그곳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할 계획이었다. 캄캄한 어둠을 응시하며 암울하게 앉아 있는데 역무원이 다가오더니 버스표를 강매했다. “국경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열차는 없어. 무조건 버스를 타고 가야만 해. 한 사람당 16달러야.”
네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예약한 쿠셋은 꺼져가던 로망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야간열차를 타게 되었다는 흥분이 온몸으로 짜르르 퍼져나갔다. 온갖 상상을 하면서 올라탄 6인실 쿠셋은 변신 로봇 같은 공간이었다.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길쭉한 좌석이 바뀌는 형태였는데, 이런 침대가 양쪽 벽에 각각 세 개씩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아래쪽 침대와 위쪽 침대 사이의 높이도 너무 낮았다.
처음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좀이 쑤셨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이 너무 좁다보니 몸을 뒤척거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똑바로 누우면 관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고, 옆으로 돌아누우면 수용소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앉아서 가는 것보다는 편했지만, 누워 있다고 해서 잠이 쉽게 드는 건 아니었다. 열차의 진동은 앉아 있을 때보다 누워 있을 때 더 크게 느껴졌다. 소음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공간에 여섯 명이나 있다 보니 크고 작은 소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어둠은 계속 부스럭거렸다.
처음에 탔던 쿠셋이 1층이었기 때문에 다음엔 3층을 예약했다. 낑낑거리며 올라간 3층은 1층보다는 확실히 덜 답답했다. 자리를 잡고 누워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커다란 가방을 든 엄마와 두 명의 여자아이들이 들어왔다. 큰 아이는 열 한두 살 정도로 보였고 작은 아이는 그보다 조금 어렸다. 아이들은 야간열차가 익숙한 듯 엄마가 만들어준 침대 위로 척척 올라왔다. 엄마는 1층에 누웠고, 아이들은 각각 2층과 3층에 누웠는데, 3층에 누운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한 생명체를 구경하는 듯한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눈이 마주친 이상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고개를 휙 돌리고 자는 척을 했다.
눈을 떴을 땐 날이 밝은 뒤였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맞은편 침대에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파란 구슬 같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초코 쿠키를 먹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아이를 응시하다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2층의 아이와 1층의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향해 ‘쉿’하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이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더니 초코 쿠키 하나를 쓱 내밀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쿠키를 받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말간 햇살이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누운 채로 입을 오물거릴 때마다 감미로운 기운이 나른하게 퍼져나갔다.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워질 즈음, 예상치 못한 형태로 느닷없이 찾아온 분위기의 정체를 파악했다. 바로, 낭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