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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3. 2023

네가 원하는 만큼

자박자박 올라간 돌계단 위에는 바욘 사원이 있었다. 그곳엔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 조각들이 가득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텅 빈 눈들은 먼 곳을 응시하는 척하며 나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애써 떨쳐냈다. 북적거리는 것보단 한가한 게 낫지. 


무거운 침묵에 잠긴 사원을 홀로 배회하고 있는데 탑 뒤에서 두 명의 소년이 튀어나왔다. 한명은 열서너 살 정도로 보였고, 다른 한명은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였다. 한눈에 봐도 형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꼭 닮은 얼굴이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다가온 그들은 다짜고짜 앙코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이드북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를 랩을 하듯 줄줄이 내뱉는 것을 보니 이런 행동이 처음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듣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것도 기가 찼건만, 심지어 형제는 동시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고 있을 때, 큰 소년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왜 이러는 거지? 의아해할 새도 없이, 재빠른 손이 카메라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내가 사진 찍어 줄게.”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무례한 행동이었다. 화가 치밀었으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사진 안 찍어줘도 돼. 차분하게 대응한 이유는 카메라를 들고 튀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한 장은 찍어야 된다고 우기는 형제를 빨리 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탑 앞에 섰다. 하지만 소년은 카메라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몰랐다.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대충 셔터를 누른 그는 황급히 카메라를 돌려주며 말했다. “우리는 학생이야. 공부하려면 돈이 필요해.” 


나쁜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기분이 확 상해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맡겨놓은 돈을 찾아가는 사람마냥 손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물어봤다. 얼마나 줘야 하는데? 소년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6달러.” 





내가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의 숙박료는 하루에 4달러였다. 앙코르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오토바이를 대여했는데, 내가 원하는 장소에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기사가 요구한 금액은 하루에 5달러였다. 형제가 떠들어댄 시간은 다 합쳐봤자 이삼 분 정도였고, 사진 찍는 시간까지 합쳐도 오 분이 안 됐다.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일은 흔했지만 6달러는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만만하게 보인 것보다 여행자를 호구로 보는 태도에 더 화가 났다. 달라는 대로 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돈을 뜯어낼 게 뻔했다. 나는 가이드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적도 없어.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끈질기게 따라붙은 건 너희들이야. 내 모토기사에게도 5달러를 주는데 너희에게 6달러를 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리자 동생이 어떡하느냐는 표정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난감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네가 원하는 만큼만 줘.” 그들은 나에게 돈을 요구할 자격이 없었다. 나도 그들에게 돈을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앳된 얼굴과 변성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삶의 경험이 일천해도 형제가 어른들의 행동을 어설프게 따라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적절한 보살핌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학교에 다니며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숙제를 하거나 친구들과 놀아야 할 시간에 관광객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설픈 가이드 흉내를 내면서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는 짓도 하지 않았을 테고.


처음부터 납득할 만한 금액을 불렀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지갑을 꺼냈다. 혼자였다면 1달러를 주려고 했는데 두 명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2달러를 꺼냈다. 형제가 원하는 것보다는 적었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많았다. 돈을 받은 형제는 탑 뒤로 사라졌다. 사원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텅 빈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본 커다란 얼굴 조각들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4년 뒤, 우다이푸르에 있는 작디쉬 사원을 방문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사원에 도착하자마자 자칭 ‘가이드’라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런 상황엔 이력이 난 터라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드들이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던 사원은 시장통이나 다름없었다. 계속 따라오던 가이드들은 내가 사원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가이드가 떠나버린 뒤에도 끝까지 남아 있던 한 명이 있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던 그는 내가 듣거나 말거나 혼자 계속 주절거렸다. 처음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는데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최선을 다해 무시하며 걷고 있을 때 흥미를 끄는 이야기 한 조각이 귀로 쏙 들어왔다. 이건 조금 더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혼자서 열심히 떠들던 그는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랐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얼굴엔 앳된 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너 진짜 가이드야? 몇 초 뒤에야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학생이야.” 혹시 대학생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매우 쑥스러워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나중에 꼭 대학에 갈 거야.” 무슨 과목을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역사! 난 역사가 너무 좋아. 인도의 찬란한 역사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졸업한 이후로는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고, 공부해보고 싶다는 사람은 아예 본 적이 없었다. 면접 볼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역사를 전공했는데 왜 우리 회사에 지원했느냐’였고, 회사 다닐 때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 가운데 하나가 ‘역사를 전공했는데 왜 이 일을 하고 있느냐’였다. 이런 경험만 잔뜩 쌓여 있는 상태에서 ‘역사를 깊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니 적응이 안 될 수밖에.


그는 사원 꼭대기에 꽂혀 있는 깃발의 의미나 코끼리 형상의 가네샤를 흔하게 볼 수 있는 이유와 같은 잡다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봤고, 가끔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굳이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었다. 몰라도 여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알고 나니 시야가 훨씬 넓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사원 투어가 끝난 뒤, 얼마를 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만큼만 주면 돼.”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심각한 톤으로 물었다. 주고 싶지 않으면 안 줘도 되는 거야?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사원에 오기 전에 점심을 먹고 짜이까지 마신 상태여서 수중에 남은 것은 70루피와 몇 개의 동전뿐이었다. 50루피 정도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을 모아서 학비에 보탤 거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70루피를 건네주었다. 환하게 피어오르는 얼굴과 귀밑까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면서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바욘 사원에서 만난 형제가 떠올랐다. 그전까지는 그들이 생각난 적이 없었던 터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바욘과 작디쉬 사이에서,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간극에 실망하고, 바라는 환경과 주어진 조건의 격차에 좌절했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었다. 4년이라는 시간차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작디쉬를 방문하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바꾸는 것뿐이라는 걸. 때로는 내가 원하는 만큼만, 때로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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