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소녀가 다가왔다. 모자를 쓴 작은 머리엔 과자가 잔뜩 들어 있는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 있었다. 식사를 한지 삼십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탓에 군것질거리가 필요하진 않았다. 실랑이가 벌어지기 전에 자리를 옮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방을 챙겨들고 엉거주춤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소녀가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장사가 안 돼.” 내 옆에 털썩 주저앉은 소녀는 뭔가를 내밀었다. 쥐포와 비슷하게 생긴 음식이었다. “이거 먹어봐.” 혼자 여행할 땐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은 가급적 안 먹지만, 이건 왠지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고마워. 작은 손으로 건네준 음식을 입에 쏙 넣자 쥐포와 비슷한 향이 퍼져나갔다. 우물거리는 나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소녀는 쥐고 있던 나머지 한 조각을 자신의 입에 넣었다. “어디서 왔어?” 한국이라고 말했더니 소녀가 다시 물었다. “혼자 왔어?” 그렇다고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기한 것을 발견한 사람마냥 나를 관찰하던 소녀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소녀가 해변에서 과자를 팔기 시작한지는 일 년 정도 됐다고 했다. 열 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한창 어리광부릴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셈이었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소녀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웠지만, 어린이 특유의 천진스러운 면도 남아 있었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신기해서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해변에서!”
시하눅빌은 현지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었다. 세상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라도 더 팔려면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소녀에게 영어는 생존을 위한 도구였다. 그 도구를 나와 잡담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왠지 과자를 사야 할 것 같았다. 바구니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감자칩과 비스킷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수입품이었다. 아는 브랜드도 있었지만 새로운 걸 먹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포장지에 ‘초코’라고 적혀 있는 비스킷을 골랐다. 이건 얼마야?
지폐와 비스킷의 교환이 마무리되자 소녀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근데 넌 이름이 뭐야?” 이제 와서 이름을 물어보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발음을 따라해 보던 소녀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활짝 웃었다. 과자 한 개가 사라진 바구니를 다시 머리에 얹은 소녀는 해변을 향해 쫄래쫄래 걸어갔다.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해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 위로 길어진 그림자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태양의 기세는 누그러진 상태였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도 보드라웠다. 한가로운 시간을 응시하다가 다시 산책에 나섰다.
혼자 해변을 거닐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보니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머리에 이고 있는 바구니에는 여전히 과자가 많았다. 나와 헤어진 이후로 하나도 팔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나랑 놀자!” 소녀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장사를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손을 끌어당겼다.
소녀에게 끌려가듯 걷다가 서양인 노부부와 마주쳤다. 피부가 그을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하눅빌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보이던 노부부는 자신들과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이런 일에는 이력이 났는지 소녀는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소녀는 그들에게 돈을 받았다. 그런 광경을 처음 본 나는 당황한 나머지 일부러 바다를 쳐다보는 척 했다. 노부부가 멀리 가버린 뒤에야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백인들은 내 사진 찍는 거 좋아해. 그래서 사진 찍혀주는 대신 팁을 받고 있어.”
여행 중에 사진을 찍는 이유는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낯선 곳을 방문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지인들의 모습도 프레임에 담는다. 렌즈는 대개 보기 좋거나 흔치 않거나 특이한 것을 향하는 법이었다. 과자 파는 어른은 관심을 끌기 어렵지만 과자 파는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세상물정을 일찍 알아버린 소녀가 관광객의 속성을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렌즈를 피해다느니 차라리 실속을 챙기기로 결심한 소녀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몰랐다.
노부부에게 받은 돈을 주머니에 넣은 소녀는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하길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온통 푸르기만 했던 하늘엔 노란빛과 붉은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해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도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왔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보고 있는 나에게 소녀가 말했다. “내년엔 학교에 가고 싶어.” 당연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면 ‘가고 싶다’는 표현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들이 누군가에겐 특별한 일이 되는 현실이 입안에 들어간 모래처럼 버석거렸다.
“우린 이제 친구지?” 소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반들반들한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 사진 찍어.” 옷을 털며 일어난 소녀가 바구니를 머리에 얹었다. “넌 친구니깐 돈 안 받을 거야.” 소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나는 가방 속에서 필름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이 작은 친구가 내년에는 꼭 학교에 갈 수 있기를, 어른 친구가 아닌 또래 친구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