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드푸르행 버스는 오전 5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다. 터미널까지는 가는 시간을 고려해서 오전 4시 30분에 알람을 맞췄다. 아침잠이 많은 편이긴 해도 알람소리엔 반드시 깼기 때문에 버스를 놓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다음날을 위해 하루를 조금 일찍 마무리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깜빡 풋잠이 든 것 같았는데 눈을 떴을 땐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방이 왜 이렇게 환하지? 불길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 개의 바늘이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민한 청각을 가진 내가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무의식중에 알람을 꺼버렸나? 그러나 시계 뒷면에 있는 스위치는 켜져 있었다. 알람이 설정되어 있었는데도 울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구입한 이래로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었건만, 왜 하필 오늘 말썽을 부리는 것인지. 철썩 같이 믿었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예매한 표를 날린 것보다 계획이 꼬인 게 더 허탈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앉아 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을 보자 이곳에서도 버스를 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조드푸르로 가는 버스 예약할 수 있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거기로 가는 버스가 없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하루 더 머문다고 문제될 건 없었지만 떠나기로 작정한 마당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출발하는 버스는 어디로 가나요? 시간표를 들춰보던 주인이 말했다. “푸쉬카르.”
이름은 들어봤지만 가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다. 만약 조드푸르에 가지 않는다면 계획했던 루트를 변경해야만 했다. 나머지 일정 전체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루 더 머무를 것인가, 오늘 밤에 떠날 것인가. 조드푸르에 가야 할 이유와 푸쉬카르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저울질 하다가 루트를 변경하기로 결심했다. 오늘밤 출발하는 버스로 예약해 주세요.
야간버스를 타는 승객은 나를 포함하여 5명뿐이었다. 모두 여행자들이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학생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동양인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비수기에 한국에서 온 여행자를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던 터라 그녀의 등장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모국어를 쓸 수 있어서 편하다는 생각만 잠시 스쳤을 뿐, 반갑거나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떠나온 나에게 새로운 만남은 설렘보단 부담이었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면 자신에 대해 말할 기회와 상대방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거리는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그녀가 외국인이었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의사소통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서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알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와 나는 어설픈 영어가 아닌 완벽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다. 속 깊은 이야기를 이해하고 복잡한 감정도 공감할 수 있는 사이였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마음이 맞으면 반나절 정도 함께 다니는 정도가 딱 적당했다. 혼자 여행하는 이유는 혼자 있고 싶어서였다. 친밀해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밤새도록 달리던 버스가 푸쉬카르에 도착했을 땐 뿌연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뻣뻣해진 몸을 버스에서 끌어내리자 서늘한 공기가 훅 달려들었다. 오싹해진 팔을 부비면서 어슴푸레한 풍경 속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여행자들은 숙소를 찾으러 제각기 흩어졌다. 남은 사람은 나와 한국인 여행자뿐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찜해두었던 숙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숙소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동행한 우리는 결국 숙소를 찾아냈다. 그곳엔 도미토리가 없었고, 가장 작은 방은 2인실이었다. 돈도 아낄 겸 방을 함께 쓰기로 했다. 여러 명의 여행자들이 머무르는 도미토리를 이용한 적은 많았으나, 낯선 사람과 2인실을 공유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몇 푼 아끼겠다고 괜한 짓을 한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 몇 푼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던 터라 일단 전략적 제휴관계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방에서 짐을 푸는 동안 그녀의 이름이 Z라는 것과 한 달 반째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깔끔해 보여서 며칠 전에 도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 신기해하는 나에게 Z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를 처음 봤을 때 6개월 정도 돌아다닌 장기여행자인줄 알았노라고. 인도에 온지 2주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내 몰골이 그 정도로 후줄근해 보인다는 것에 조금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흡족했다. 인도에선 초짜로 보이는 것보다 경력이 많아 보이는 쪽이 훨씬 낫지.
여행 중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웃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어색함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 싶을 정도로 Z는 빠르게 내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충동적으로 찾아온 푸쉬카르는 기대 이하였으나 Z와의 여행은 기대 이상이었다. 대단한 광경을 본 적도, 특별한 장소에 간 적도 없었지만, 우리는 의미 있는 시간 속에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며 인상적인 추억을 만들었다.
푸쉬카르에서만 유효할 줄 알았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남은 일정을 동행했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떠난 남인도와 스리랑카에서도 우리는 함께였다. 모르는 사이에서 아는 사이가 되고, 아는 사이에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건 예민함의 결이 비슷해서였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서로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입이 짧고 소화기관이 약해서 한 번에 많이 못 먹는 것도 비슷했고, 체력은 저질인데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기질도 비슷했으며, 온갖 일들에 신경 쓰고 걱정도 많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도 비슷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늦잠을 자느라 버스를 놓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게스트하우스에서 푸쉬카르행 버스표만 팔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그 표를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 평생의 친구를 얻고서야 깨달았다. 아침까지 푹 잘 수 있게 해준 알람시계는 얄궂게도 그날 이후로는 뒤통수를 친 적이 없었다.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며 정해진 시간에만 울리는 하얀 시계를 볼 때마다 궁금했다. 왜 하필 그 순간에만 작동하지 않았을까.
살다보면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명확한 일들이 있었다. Z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됐기에 내가 받아들여야 할 진실은 하나였다. 시계가 울리지 않았던 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