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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5. 2023

들어줄 수 있는 마음

“일 년에 서너 번 정도는 오는 것 같아.” 그녀에게 물리적 거리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현실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이스탄불이 그렇게 좋아? 모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녀는 결국 고백하고 말았다. “사실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거야.”


스위스 여자와 터키 남자가 만난 곳은 이스탄불이었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홀로 터키를 찾은 그녀는 현지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투어그룹에 합류했다가 그룹을 인솔하는 가이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가이드 역시 그녀에게 반했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에게 사적인 감정을 함부로 드러낼 순 없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그들은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감정을 결을 확인한 그들은 고심 끝에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시작된 장거리 연애는 몇 년 동안 이어졌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지부진하게. 


“일 년에 몇 번 밖에 못 만나긴 하지만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런데 남자친구네 집안에서 나를 안 좋아해.” 생기가 넘치던 그녀의 얼굴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 최악인 건, 우리 부모님도 남자친구를 안 좋아하신다는 거야.”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그녀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종교 때문이야. 남자친구가 보수적인 무슬림 집안 출신이거든. 내가 개종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할 수 없대.” 혹시 너희 부모님도 같은 이유로 반대하시는 거야? 그녀는 더 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스스로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개종할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종교가 다른 두 사람이 가정을 꾸리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야.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면 같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시거든.” 만약 남자친구가 개종하면 부모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 같아? 그녀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했다. 그럼 결국 종교가 장애물인 거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사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어. 나는 그 사람이 스위스에 살았으면 하거든. 그런데 그는 내가 터키에서 살기를 바라고 있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었다. 개개인은 독립적인 인격체였고, 각자의 우주를 품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었다. 상대방에게 맞춰줄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는 한, 이들의 관계는 평행선을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 수 있는 데까진 가보겠다고 했다. “평생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마음 가는 대로 하려고.”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는지 그녀는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스탄불에 올 때마다 가는 식당이 있어. 남자친구가 알려준 곳인데,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괜찮아.” 식사하는 동안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말하는 쪽은 대체로 그녀였고, 듣는 쪽은 대체로 나였다. 딱히 할 얘기도 없었던 데다가 주저리주저리 떠들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도 없었기 때문에 청자 역할이 오히려 편했다. 최대한의 동조와 최소한의 견해만으로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참 동안 얘기하던 그녀가 불현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 처음 만난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다 털어놓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녀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별의별 얘기를 다 해버렸네.”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약간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들어줘서 고마워.”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보다는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쪽이 더 쉬운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래서 혼자 여행할 때마다 누군가를 만났고, 의도치 않게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상황이 전개됐다. 가벼운 인사로 물꼬를 튼 대화는 여행 관련 내용으로 흘러가다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곤 했다. 어떤 사람은 이십년 넘게 일만 해오다가 문득 이렇게 살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람에 나섰고, 어떤 사람은 이별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고생스러운 여정을 선택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해 낯선 장소를 떠돌아 다녔다. 20대 여행자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 30대 여행자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의문이 생겼다고 했고, 40대 여행자는 좀 더 일찍 여행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고, 50대 여행자는 하고 싶은 일을 미루며 살아온 것이 후회된다고 했다.


허심탄회하게 속을 드러낸 그들은 국적도 언어도 사연도 달랐다. 그러나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는 스스로의 행동을 매우 놀라워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라며 민망해하는 부류도 있었고, ‘나 원래는 이렇지 않아!’라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런 반응과 마주할 때마다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털어놓기 싫어서가 아니라 털어놓을 수 없어서 가슴에 꼭꼭 담아두는 말들도 있었다.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중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말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국어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놔두고 굳이 낯선 외국인을 선택한 이유는 잘 알아듣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르는 상태에선 판단할 수 없었다. 편견이 생길 여지도 없었다. 그들에게 난 비영어권에서 온 완벽한 타인이었다. 영어권 사람의 말은 30퍼센트도 이해하지 못했고, 비영어권 사람의 말은 절반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을 알아듣는데 한계가 있었던 탓에 표정과 눈빛, 손짓과 몸짓을 읽으려 노력했다.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내 모습은 분명 상대방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다 알아들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다 알아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진실은 알 수 없어도 진심은 알 수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그들은 작별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한때는 이런 기대감을 품기도 했었다. 여행이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켜줄 거라고. 낯선 이들과 부딪치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해야 했고, 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말을 잘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말과 관련된 변화는 늘어난 혼잣말뿐이었다. 기대했던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결과는 얻었다. 듣는 것도 능력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었다. 청각에 이상이 없는 한, 누구나 들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들어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듣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소리는 그저 소음에 불과했다. 소통하기 위해선 상대를 의식해야 했다. 그의 말에 오롯이 집중해야 했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써야 했다. 언제든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적당히 열어놓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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