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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6. 2023

스리랑카에서 가장 안전한 곳

마타라에 온 이유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서였다. 몇 시간 정도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난조를 보이는 컨디션이 영 불안했다.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몸살이라도 걸리면 남은 일정이 꼬여버릴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다음날 떠나기로 결심했다. 당장 가야 할 이유도 없는 상황에서 당일치기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아침에 떠나자. 


스쳐가는 도시에선 까다로워질 필요가 없었다. 잠만 잘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다음날 다시 터미널로 와야 했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숙소를 골랐다. 그런데 정확한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큰 호텔들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알고 있지만 작은 게스트하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릭샤가 눈에 띄었다. 기사에게 다가가 별다른 기대 없이 숙소의 이름을 말했다. 잠시 생각해보던 그는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큰길을 질주하던 릭샤는 골목으로 휙 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느 가정집 앞에 멈춰 섰다. 간판도 없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이상했던 건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다수의 남자들이었다.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경찰처럼 보였는데,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야.” 잘못 찾아온 것 같았지만, 반쯤 열려 있는 대문 사이로 고개를 쑥 밀어 넣어 보았다. 마당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뭔가를 물어보던 릭샤 기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대로 찾아온 거 맞대.”





여자를 따라 들어간 마당은 아늑했다. 넓지는 않았으나 나무와 풀이 많아 깨끗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주인이 낮잠을 자고 있다고 알려준 여자는 나에게 2층 맨 끝에 있는 방을 보여주었다. 창문이 작아서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는 방은 혼자 쓰기 적당했다. 문을 열고 나오면 마당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구조여서 답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룻밤인데 뭐. 


짐을 대충 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한낮의 열기로 후끈거리는 방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런 컨디션으로 일정을 강했다면 분명 지독한 몸살에 걸렸겠지.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낮잠을 자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억지로 일으킨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테라스 너머로 쏟아져 내리는 빛이 너무 찬란해서 걸음을 멈추고 마당을 응시했다. 짙은 초록빛 식물들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대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벽에 기대고 앉아 있는 남자들의 모습과 벽 꼭대기에 설치된 삐죽삐죽한 가시철망이 보였다. 철망 안쪽에 자리한 너른 공간에는 몇 개의 큰 건물들이 답답하게 붙어 있었다. 음울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것이 평범한 건물은 아닌 듯 싶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처음 보는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주인이었다. 인상 좋은 노부인을 상상했던 나는 활력 넘치는 젊은 얼굴에 당황했다. 그녀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를 것인지, 어디로 갈 예정인지 등을 쉴 새 없이 캐물었다. 그대로 두면 질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얼른 노트와 펜을 꺼냈다. 여기 주소 좀 알려 주세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주소도 모르면서 어떻게 찾아 왔느냐는 질문 따윈 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와 펜을 뺏어가서 자신이 직접 주소를 써주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밥을 먹고 동네를 조금 돌아다닐 거라고 말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트와 펜을 돌려주던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어봐서 적어주긴 했지만 주소 몰라도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아. 그냥 감옥 옆에 있는 집으로 오면 돼.”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죄인들 가두어 두는 그 감옥?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으로 나가면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있지? 거기가 감옥이야.” 별안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집과 감옥 사이에 놓인 것은 아담한 길 뿐이었다. 스리랑카까지 와서 감옥을 보았다는 사실보다 감옥과 가장 가까운 집이 숙박시설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황당했다. 많고 많은 숙소 중에서 하필 이런 곳을 찾아오다니.  





대문을 열고 나가자 담벼락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경찰들이 보였다. 모르고 볼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정체를 알고 나니 괜히 긴장이 됐다. 허둥거리며 큰 길로 빠져나왔다. 손님이 많은 작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닷가를 구경하고, 오래된 건물들을 감상하다가, 간식으로 먹을 과자와 과일을 구입했다. 비닐봉지를 들고 설렁설렁 걸어오는데 주변 풍경이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서 노트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소가 적힌 페이지를 펼쳐서 보여주려고 하다가 불현듯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감옥에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한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들이 알려준 곳으로 걸어가다가 갈림길이 나와서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 사람도 망설임 없이 길을 알려 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동네 랜드마크인 것 같았다. 과자와 과일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흔들면서 터벅터벅 걷다보니 사방이 금세 어두워졌다. 다행히 익숙한 골목이 나타났고, 나란히 앉아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주인이 마당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왔는지 알려주자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스리랑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야. 경찰들이 밤낮없이 감옥 앞을 지키고 있거든.”


방으로 들어가기 전, 테라스에서 골목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왔다 갔다 하는 경찰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나타났다. 감옥의 음산한 실루엣은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간식을 먹으며 빈둥거렸다. 밤이 깊어지지도 않았건만 노곤함이 성급하게 밀려왔다. 창밖에선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옆방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여기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알고 왔을까.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낯선 장소에 처음 도착한 날에는 늘 잠을 설쳤지만 이날은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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