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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7. 2023

나만 따라와


닌나지를 둘러본 다음 J를 만나러 갈 계획이었다. 느긋하게 돌아다녔음에도 사찰을 나왔을 땐 약속 시간까지 두 시간 이상 남아 있는 상태였다. 어떻게 할 것인지 궁리하는 과정에서 묘신지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약속 장소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며 빈둥대느니 새로운 장소에 가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찾아가지 못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큰 사찰이라면 분명 표지판 같은 것이 있을 테고, 설령 없더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동네 주민이라면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큰길을 따라 무작정 걷다보니 표지판이 나타났다. 거기엔 골목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반듯한 골목을 중심으로 양옆에 늘어선 주택들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적막했다. 길을 물어볼 만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정적인 풍경뿐이었다. 갈림길이 나올 때까진 일단 가보자. 계속 전진하고 있는데 무언가가 시야로 들어왔다. 철길이었다. 전날 밤에 가이드북에서 봤던 글이 언뜻 기억났다. 묘신지가 무슨 역 근처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철로를 따라가면 언젠가는 역이 나오겠지. 역 근처 어딘가에는 묘신지가 있을 거고.





그렇게 오 분 정도 걸었을 즈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딱 봐도 동네 주민인 것 같아서 쪼르르 다가갔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쪽이 묘신지 가는 방향이 맞죠?’였지만, 할 줄 아는 일본어가 몇 마디 밖에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스미마센, 묘신지?


제대로 가고 있다면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좌우로 움직일 터. 그런데 할머니는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이런 시나리오는 예측하지 못했던 터라 머릿속이 안개로 자욱해졌다. 이게 아닌데.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나를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와따시와 칸코쿠진데쓰.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던 할머니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셨다. 이제는 그냥 손짓으로 알려주시겠지 싶었는데 웬걸. 할머니는 처음보다 더 느린 속도로 말씀하셨다. 겨우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고, 더 늦기 전에 수습해야 했다. 일본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손을 휘저으며 한국어로 말했다. 저는 일본어 못해요.


할머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멈칫하셨다. 명징하게 떠오른 난감한 기색은 상황을 파악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냥 방향만 알려주시면 되는데. 고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쓸데없이 부풀려 놓은 것 같았다. 애초에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 딱 한마디를 하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왠지 이런 뜻인 것 같았다. “나만 따라와.”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관절이 좋지 않으신지 할머니는 한쪽 다리를 살짝 절면서 걸으셨다. 겉으로 보기엔 내가 할머니를 부축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내가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보폭도 크고 걸음도 빠른 편이어서 할머니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초반에는 스텝이 약간 꼬이기도 했으나 점점 감을 잡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스텝이 맞춰졌다. 


묘신지로 가는 동안 할머니는 일본어로, 나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눈치와 상상과 짐작과 추측을 동원해서 만담하듯 주거니 받거니 했다. 중간 중간 웃음도 나왔는데, 어색해서 웃은 것이 아니라 정말 웃겨서 웃었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 걸었더니 마침내 묘신지 북문이 나타났다. 걸음을 멈춘 할머니는 손으로 문을 가리키셨다. 어설픈 일본어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던 나는 해맑게 웃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중요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뿌듯함을 발견했다. 인사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도 커서 실례를 무릅쓰고 할머니를 살짝 끌어안았다. 크게 놀라실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 등을 토닥거려주셨을 뿐.


할머니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하셨다. 이미 걸어온 길을 나를 데려다주기 위해 다시 걸었고, 나를 데려다준 이후에 또 다시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같은 길을 세 번이나 걷는다는 것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불편한 다리로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은 할머니는 천천히 멀어졌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야무지게 다짐했다. 길을 헤매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만약 그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직접 데려다주는 수고를 감당하겠노라고. 다짜고짜 손을 잡는 것까진 못하더라도 ‘나만 따라와’라고 말할 수 있는 멋진 할머니가 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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