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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7. 2023

달콤한 도시의 거머리

사탕(Candy)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달콤한 이미지를 연상시켰던 캔디(Kandy)는 시종일관 눅눅했다. 우기에 비가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사납게 퍼붓는 빗줄기는 Z와 나를 당혹감에 빠뜨렸다. 시간이 지나면 그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잿빛 구름 덩어리들이 잔망스럽게 꾸물거렸다. 일정이 여유로웠다면 빗소리를 들으며 숙소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린 다음날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캔디에서의 마지막 날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순 없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짧게라도 산책을 하고 오자는 결론을 내렸다. 


우비를 입은 Z와 우산을 쓴 나는 우다와타켈레 삼림보호구역으로 향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숲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거대한 나무와 무성한 잎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빗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장엄한 광경은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세상과 단절된 울창한 숲에서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질퍽질퍽한 길을 걸을 때마다 풀냄새와 꽃냄새, 흙냄새와 물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서늘한 기운이 없었더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꿉꿉함이었다. 비를 머금은 몸이 점점 무거워졌지만, 원초적인 풍경에 매료되어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산책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단이 벌어지기 전에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익숙한 지점에 다다랐을 즈음, 발에 뭔가가 달라붙은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Z와 나는 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젖은 나뭇잎이나 흙이 얼마든지 묻을 수 있는 상태였다. 닦아봤자 또 뭔가가 묻을 것이 뻔했기에 그냥 앞만 보며 걸었다. 갑자기 앞서 걷던 Z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발에 벌레가 붙었어!”


Z를 구해주기 위해 달려가던 중, 발밑에서 뭔가가 물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주뼛거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샌들을 벗었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발가락과 발등에 처음 보는 벌레들이 잔뜩 붙어 있었던 것이다. 플라나리아처럼 생긴 벌레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에 지름이 약 2미리 정도 되는 몸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달라붙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피부 속을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으아아악! Z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면서 발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벌레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있는 나뭇잎을 이용하여 벌레를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했다. 피부에 박혀 있는 벌레를 빼내자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벌레의 정체가 거머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젖은 나뭇잎 아래서 피 냄새를 맡은 수많은 거머리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채 출입구 방향으로 질주했다. 숨이 금세 차올랐지만 거머리들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무조건 뛰어야 했다. 체력이 고갈되는 와중에도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숲을 찢어놓는 포효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우리 밖에 없는 숲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거머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숲을 빠져나가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출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흐르는 물로 다리와 신발을 씻어내며 악착같이 들러붙어 있던 거머리들을 떼어냈다. 정강이까지 기어 올라온 거머리는 피를 얼마나 많이 빨았던지 몸집이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잘 떨어지지도 않는 거머리를 겨우 빼내고 나자 정강이를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린 피부 위로 흐르는 새빨간 피는 보기엔 처절했으나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벌레한테 물리면 아프거나 가렵기 마련인데 거머리는 달랐다. 피부를 파고들 때도, 피를 빨 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거머리가 붙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피가 묻지 않도록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다음 숲을 빠져나왔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 비틀비틀 숙소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눈동자는 초점조차 맞지 않았다. 몰골만 보면 지옥에서 겨우 탈출한 사람 같았다. 기절하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상처가 난 부위를 살펴보았다. 몇 군데나 물렸는지 헤아려보다가 다리 뒤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거머리였다. 으아아악! 


비명소리에 놀란 Z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거머리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Z도 비명을 질러댔다. 주저앉아서 울고 싶어졌지만 거머리가 붙어 있는 상태에선 그럴 수도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건을 잡은 뒤, 그것을 이용해서 그악스럽게 붙어 있던 거머리를 억지로 떼어냈다. 내 피를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온몸이 피둥피둥했다. 물린 자리에서 왈칵 쏟아져 나오는 피는 끔찍했다. 그러나 아프지는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피를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될 줄이야.


최후의 만찬을 즐긴 거머리는 마당에서 처형됐다. 처형 장면을 목격한 Z의 설명에 따르면, 숙소 직원이 거머리에게 소금을 뿌리자 피를 토해내며 죽었다고 했다. 우리가 거머리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주인 아주머니는 직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지혈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이 종이와 성냥을 가져왔다. 상처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직원은 소독제를 발라주었다. 마당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종이를 태우던 아주머니가 타고 남은 재를 으깨기 시작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거머리에게 물렸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야.”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우리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는 고운 가루가 된 재를 상처 부위에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이날 이후로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숲은 물론이거니와 풀이 많은 공원에 가는 것조차 불안했고, 흙길을 걸을 땐 거머리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바닥만 쳐다보며 걸었다. 비 오는 날에도 웬만해선 샌들을 신지 않았고, 도시를 벗어나야 할 땐 반드시 발목이 긴 두꺼운 양말과 튼튼한 운동화를 신었다. 상처를 볼 때마다 거머리가 떠오르는 바람에 다리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고통 없이 생긴 상처는 고통 없이 아물었다. 흔적이 오래 남아 있긴 했으나 시간은 결국 그것마저 지워버렸다. 거머리에게 물렸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정확히 어느 부위를 물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시점이 되어서야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이 완전히 휘발된 후에 남은 것은 늘 그렇듯,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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