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은 대부분 타지에서 온 여행자였다.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현지인들도 사진을 찍었지만, 평범한 일상들로 채워진 작은 동네에서 카메라는 흔치 않은 물건이었다. 인도의 어느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그곳은 유명한 관광지였으나 외지인들이 찾아가는 장소는 정해져 있던 탓에 관광지만 벗어나면 현지인들의 생활공간이 펼쳐졌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가트도 그 중 하나였다. 조잘거리며 뛰어다니는 꼬맹이들과 어린 아기를 안고 산책 나온 아버지들, 호수에 풍덩풍덩 뛰어 들어가는 소년들과 그 물에서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어머니들로 시끌벅적한 가트에서, 나는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몇몇 아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수줍어하면서 피식피식 웃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하자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씽긋 웃었다. 사진 찍어달라고? 셔터를 누르는 척 하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을 몇 장 찍은 다음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머리를 맞댄 채 작은 액정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 마냥 웃어댔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아이들 중 하나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땡큐!”
까르르 웃으며 우르르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가에선 씻는 아이들과 씻기는 엄마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복작거리는 광경을 찍고 있을 때 딸의 머리를 감기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뭔가를 말해주었고, 아이는 머리카락에 비누거품이 잔뜩 묻어 있는 상태로 내 쪽을 돌아보며 포즈를 취했다. 서둘러 셔터를 누른 다음 모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찍은 사진을 확인한 그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특히 아이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 신기했는지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린 아이는 머리를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로부터 열흘 뒤쯤, 시크교 성지인 황금사원을 방문했다.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데 웬 남자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내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근처에는 그 아이의 형으로 보이는 몇 명의 소년들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아이는 기대에 찬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자신의 모습이 나온 사진을 확인한 아이는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었다. 고맙다고 말한 아이는 미련 없이 돌아서더니 가던 길을 갔다. 기다리던 형들이 동생의 뒤를 따랐다.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던 이들은 자신이 나온 사진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찍어준 것을 고마워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내가 과연 그 인사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단지 셔터를 눌렀을 뿐인데. 근사한 인생샷을 남겨준 것도 아닌데. 인화한 사진을 준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고마워하는 것일까. 여행의 순간들을 따뜻한 장면들로 채워준 쪽은 오히려 그들인데.
이듬해 여름, <인디아나 존스> 3편의 촬영지로 유명한 페트라를 방문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입장했음에도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진 페트라는 이미 찜통이었다. 달궈진 숨을 힘겹게 토해내며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던 중, 당나귀를 타고 가던 베두인 소년을 만났다. “당나귀 타고 갈래? 15디나르만 내면 되는데.” 내가 거절하자 소년은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앞질러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분도 되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괜히 올라왔다고 후회하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던 나에게 소년이 당나귀를 끌고 다가왔다. “정상까지 태워줄게.” 설마 나 때문에 되돌아온 건가 싶었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호의는 고맙지만 그냥 걸어갈래. 그러자 소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돈 안 받을 테니까 그냥 타. 이렇게 더운 날에 정상까지 걸어가면 쓰러질 수도 있어.”
당나귀를 타고 올라간 산꼭대기는 나바테아인들이 종교 행사를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베두인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는 듯 했다.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던 아이들은 웅장한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것저것 물어보던 아이들은 카메라를 보더니 대뜸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찍어준 사진을 보여주자 까르르 웃어댔다. 나에게 당나귀를 태워준 소년은 사진을 찍어준 답례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크기는 제각기 달랐으나 두께는 비슷한 세 개의 쇳조각이었다. 마모가 심하고 깨진 부분도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조각들이 동전이라는 것을.
상태가 나쁘긴 했으나 페트라가 번성했던 시절에 사용됐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잔뜩 흥분한 채로 과거의 조각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나에게 소년이 말했다. “여기 엄청 넓어서 걸어 다니기 힘들어. 15디나르만 내면 네가 원하는 곳에 다 데려다줄게.” 내가 구입한 티켓이 당일에만 유효했다면 아마도 난 소년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입한 티켓은 2일권이었다. 첫날은 당나귀를 타고, 다음날은 걷는 일정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일 가이드가 된 소년은 열 두 살이었다. 다섯 명의 누나와 한 명의 남동생,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산 아래 쪽에서 마주친 소년의 아버지는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는 장남이 기특했던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신이 난 소년은 나를 태운 당나귀를 이끌고 관광객들이 가는 장소들과 베두인들만 아는 장소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 여정에는 뜻밖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베두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지나가는 길목에서 만난 베두인 할머니는 차를 끓여주었고, 점심시간이 됐을 땐 작은 동굴 안에서 베두인들이 나누어준 음식을 먹었다. 그늘에 앉아서 쉬는 동안에는 베두인 아저씨가 피리를 연주해 주었고,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를 피해 들어간 동굴에서는 베두인 가족의 환대를 받았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가족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웃을 맞이하는 분위기였다.
나에게 자리를 마련해준 뒤, 그들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가족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빈 페트병을 칼로 잘라내서 컵을 만들었다. 원래는 투명했을 페트병의 색은 반투명에 가까웠고, 페트라의 바위와 비슷한 붉은색 차에는 걸러지지 않은 차잎과 뽀얀 먼지가 둥둥 떠 있었다. 이미 많은 양의 차를 마신 상황이었지만 성의가 고마워서 남김없이 다 마셨다.
달콤쌉싸름한 뒷맛을 음미하다가 카메라를 꺼냈다. 모두의 시선이 카메라로 쏠렸고, 몇몇은 기다렸다는 듯이 렌즈를 응시했다. 그들의 모습을 찍은 다음 사진을 보여주었다. 액정을 들여다보던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가리키며 박장대소했다. 사진 한 장으로 이토록 즐거워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있을 때 가족 중 한 명이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우리 나온 사진 보내줄 수 있어?”
우편으로 보내려면 주소가 필요했다. 가방에서 꺼낸 펜과 종이를 건네주자 그들이 손사래를 쳤다. “뭐 하러 우편으로 보내? 나중에 다시 올 때 주면 되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이었다. 주소를 안 가르쳐줄 분위기여서 솔직하게 말했다. 언제 다시 요르단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 통해서 줘도 돼. 네 친구 중에 페트라 오는 사람이 있을 거 아냐. 그 친구한테 부탁해. 우린 항상 여기 있으니까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난감해졌다. 한국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나와는 거리감각 자체가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너무 많이 봐서 외국인들은 쉽게 페트라에 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몰랐다.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제발 주소 좀 적어주세요. 가족 중 한 명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사실 우리는 영어로 쓰는 법을 몰라. 주소도 아랍어로 밖에 못 써.”
이번에는 내가 손사래를 쳤다. 굳이 영어로 쓸 필요는 없다고. 아랍어로 써도 괜찮다고. 그제야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주소를 써주었다. 하얀 종이에 적힌 구불구불한 글씨는 부드러운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붉은 사암의 곡선과 비슷해서 애틋한 느낌마저 들었던 글씨가 행여나 구겨질까 고이 접어 가방 깊숙이 넣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들에게 보내줄 사진을 인화했다. 산꼭대기에서 찍은 아이들의 사진, 피리 부는 아저씨의 사진, 동굴 안에서 만난 가족들의 사진을 인원수에 맞춰서 인화하고 나니 양이 제법 많았다. 커다란 봉투에 사진을 넣은 다음, 아랍어로 적어준 주소를 봉투 겉면에 붙였다. 그리고 주소 밑에 ‘JORDAN’이라고 썼다. 우체국에 가는 동안 약간 걱정이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구불구불한 아랍어를 쳐다보던 직원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이게 주소인가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요르단까지만 발송되면 현지에서 알아서 배송해줄 거라고 주장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까지 꼼꼼하게 훑어본 직원은 봉투의 무게를 측정한 뒤 요금을 알려주었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 집으로 반송될 것이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면 베두인들에게 무사히 도착할 터였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진이 들어 있는 두툼한 봉투는 한 달이 지나도 되돌아오지 않았고, 두 달이 지나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세 달째로 접어들었을 때, 그냥 믿기로 했다. 페트라의 베두인들이 사진을 잘 받았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