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 왔으면 풍차는 봐야하지 않겠어? 이 부분에 대해선 L과 M과 나의 생각이 일치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실물을 보지 않는 것은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잔세스칸스는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삼십 분 거리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반나절 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건너뛰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중앙역에서 출발한 잔세스칸스행 열차는 한산했다. 현지인들만 드문드문 앉아 있을 뿐,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외국인이었던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커다란 눈에는 순박한 호기심이 흘러 넘쳤다. 그걸 알면서도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엔 아무리 많이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었다. 나에겐 시선을 받는 일이 그랬다. 앞에 나서는 것은 물론, 주목받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에게 시선을 받는 상황은 그저 피하고 싶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창밖만 바라보았다.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출발한지 십분 정도 지나자 한갓진 전경이 펼쳐졌다. 투명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대지는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싱그러운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슬슬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열차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높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미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불길한 느낌이 밀려왔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우리끼리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노부부를 바라보았다. 출발할 때부터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노부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이 열차가 풍차마을로 가는 게 맞나요?
노부부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당황한 듯 보였다. 혹시 풍차마을이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으신 건가 싶어서 잔세스칸스로 가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지명을 듣는 순간 노부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우리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잔세스칸스로 가는 게 아니라는 뜻일까.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심란해진 우리는 한국어로 속닥거렸다. “어떡하지?” 바로 그때,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시더니 그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뭔가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서 있던 할아버지는 다른 칸으로 휙 가버리셨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으나 눈빛엔 걱정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역무원에게 희망을 걸기로 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표 검사를 하지 않느냐며 투덜거리던 우리는 높고 견고한 언어의 장벽을 실감했다. 영어는 그저 널리 쓰이는 언어일 뿐이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언어는 아니었다. 한쪽이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다른 한쪽이 전혀 할 줄 모르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양쪽이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쓸모 있는 언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구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등장한 할아버지 뒤에는 덩치 큰 아저씨와 작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우리를 향해 아저씨가 영어로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아저씨는 우리가 열차를 잘못 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디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엔 뿌듯해하는 표정이, 할머니의 얼굴엔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의 말간 얼굴에선 자랑스러워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임무가 끝난 아저씨는 아들을 데리고 홀연히 퇴장했다.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할아버지와 수고했다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할머니를 보고 나서야 눈치챘다.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 할아버지가 직접 객차를 뒤지고 다녔다는 것을. 처음 본 여행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토록 귀찮고 수고로운 일을 기꺼이 해주었다는 것을.
몽글몽글해진 상태로 앉아 있다가 노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는 모습에 감탄하다가 문득 그들의 눈동자 색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을 닮은 파란 눈과 들판을 닮은 초록 눈은 부드럽게 반짝거렸다. 주름이 많아지는 것과 눈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나자 기차를 잘못 탄 것이 오히려 행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차마을은 아마도 예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예쁨을 직관하지 못한 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트리밴드럼에서 야간열차에 오를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12시간 동안 열차를 탔지만 피곤하다는 것 말곤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하차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폰디체리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자 식은땀이 나면서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어지럼증까지 찾아왔다.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런 상태로 출발했다간 얼마 가지도 못해서 큰 사단이 날 게 뻔했다. 나 지금 내려야 할 것 같아. 뒤쪽에 앉아 있던 Z가 당황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뭐든 토해버리고 싶었으나 나오는 건 헛구역질뿐이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어지럼증 때문에 몸을 가누는 것조차 버거웠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신문보급소로 보이는 건물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쓰레기가 나뒹구는 지저분한 거리였지만 깨끗한 장소를 찾아갈 여력조차 없었다. 예약한 숙소는 폰디체리에 있었고, 그곳까지 가려면 버스나 택시를 타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태가 금방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Z는 택시를 찾아보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새벽이었는데도 거리엔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행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웅성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포위하듯 감쌌다. 나를 관찰하던 그들 가운데 몇 명이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누군가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달려갔던 누군가가 다시 나타났다. 어떤 남자와 함께.
부스스한 몰골과 한쪽만 눌린 머리, 멍해 보이는 눈빛을 갖고 있던 남자는 자다가 끌려나온 듯 했다. 비몽사몽 중에 있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어설픈 영어로 물었다. “폰디체리?” 그렇다고 했더니 그가 되물었다. “버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몸이 아파서 버스 못 타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으로 보아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앰뷸런스?” 구급차를 불러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서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혼자?”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일행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친구랑 같이 왔어요. 갑자기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온 ‘친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구는 택시를 찾으러 갔어요. “택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손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친구. 그 다음엔 누군가를 부르는 손짓을 했다. 택시. 마지막으로 내가 앉아 있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
마침내 이해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듣던 사람들 사이에서 ‘아하’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 나를 부르는 Z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중계해 주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안도하는 기색으로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끌려나온 남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통역자로서의 임무가 끝났는데도 그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나에게 살짝 웃어보이던 그는 Z가 나를 부축해주는 장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곳을 떠났다. 잠이 완전히 깬 모습으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교통편을 고민하고 있는데 식당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페트라 갈 거야?” 그렇다고 하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하닷 버스터미널에 가면 와디 무사로 가는 미니버스가 있어. 그 버스를 타고 와디 무사로 가서 페트라로 이동하면 돼.”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더니 택시 한 대가 보였다. 꾸물꾸물 다가오던 택시는 내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뒷좌석에 올라타자 사람 좋게 생긴 기사가 미터기를 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택시기사와 승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뻔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와하닷 버스터미널. 내 말을 들은 기사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발음이 이상해서 못 알아들었나? 다시 한 번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기사는 갑자기 미터기를 꺼버렸다.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택시는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올 때 택시를 이용했기 때문에 출발하기 전에 미터기를 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택시기사가 이런 걸 착각할 리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타자마자 미터기를 켰었다. 이것을 끈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별안간 온갖 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요금이 더 나오도록 일부러 멀리 돌아가려는 것이겠지. 어쩌면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사기꾼을 만난 것일 수도. 혹시 어딘가로 끌고 가서 돈과 여권을 빼앗으려는 건 아닐까. 만약 외국인을 납치해서 어딘가로 팔아넘기거나 가족이나 국가에 몸값을 요구하는 악당을 만난 것이라면......
가능성을 헤아려 보았을 뿐인데도 머리카락이 주뼛 서면서 식은땀이 났다. 옆자리에 놓아둔 배낭엔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없었다. 호신용품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를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풍경이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간 크게 다치거나 죽을 것 같았다. 일단 차가 멈추는 순간을 노리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여권과 돈과 신용카드를 분리해 놓는 편이 나을 듯 싶었다. 기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택시가 큰 건물 앞에 예고 없이 멈춰 섰다. 어리둥절해진 상태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알파벳이 적혀 있는 커다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랜드 하얏트 호텔.’
인질을 가두어 놓기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내가 납치되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해졌지만 안심할 상황도 아니었다. 강도나 악당일 가능성은 사라졌어도 사기꾼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도어맨이 택시로 다가왔다. 기사는 열린 창문을 통해 그에게 뭔가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도어맨은 후다닥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오면 두목에게 도착했다고 보고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극단적인 상상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내리는 게 나을지도 몰라.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고 있는데 도어맨이 매니저급으로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곧바로 택시로 다가온 남자에게 기사는 뭔가를 설명했다. 남자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나를 바라보았다. 예의바른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목적지가 어디에요?” 뜬금없는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대답을 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던 터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와하닷 버스터미널이요.
남자는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기사에게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기사는 ‘아하’라는 소리를 냈다. 남자는 다시 호텔로 들어갔고, 기사는 나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몇 마디를 하던 그는 미터기를 켜더니 핸들을 휙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택시 안에서 기사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과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일부러 호텔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 여분 만에 도착한 버스터미널에는 수십 여 대의 미니버스가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는 와디 무사로 가는 버스 앞에 택시를 세웠다. 미터기에 찍힌 요금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주고 배낭을 끌어당겼다. 거스름돈을 주려는 기사를 향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괜한 의심을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센스 있게 대처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나마 표현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기사는 예상치 못한 팁을 받은 사람마냥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슈크란!” 그것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몇 개의 아랍어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나도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