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가 낮은 가로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거나 그마저도 없는 거리에선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감상할 만한 야경이 존재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불빛은 필수였다. 휘황찬란하진 않더라도 실루엣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은은함은 있어야 했다. 야경으로 유명한 장소들은 대부분 조명을 잘 활용한 곳이었다. 캄캄할수록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제대로 보려면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밤에 다시 나가야 했다. 그러나 낮과 밤의 거리는 확연히 달랐다. 온종일 북적이던 거리도 해가 지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해졌다. 밤길이 안전한 나라는 생각보다 적었다.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치안 상태가 괜찮은 나라는 더 적었다.
평소에도 밤늦게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지 않다보니 저녁만 먹고 귀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식사가 일찍 끝났을 땐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귀가했다. 혼자 택시 타는 상황이 불편해서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살아온 내가 다른 나라에서 굳이 밤거리를 배회할 이유는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숙소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평온하게 빈둥거렸다.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음악을 듣거나 지도를 보면서.
혼자 있을 땐 하지 않았던 행동을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밤 외출도 그 중 하나였다. 어두워진 이후로는 방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홍콩에선 평소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다. 복작거리는 밤거리를 누비며 현란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치안까지 괜찮은 곳은 더 드물었다. 두 가지 요건을 다 갖추고 있는 홍콩은 여행자를 일찍 재우는 도시가 아니었다. 밝은 밤은 각성을 강요했다. 고단한 몸과 말짱한 정신은 홍콩에선 흔한 조합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하루는 한밤중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때로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K와 M과 함께 홍콩에 갔을 땐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짧은 일정을 고려하면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마땅했지만, 혈기왕성한 이십대에겐 움켜쥐는 것보다 내려놓는 것이 더 어려웠다. 강행군을 선택한 우리는 질식할 것 같은 더위와 싸우며 홍콩을 훑고 다녔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녹초가 됐으나 야경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직접 확인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찾아간 장소에서 바라본 스카이라인은 낮보다 아찔했다. 제각기 다른 빛을 뿜어내는 길쭉한 발광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세계는 비현실적으로 호화로웠다. 바다에 비친 색색의 불빛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물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몽환적인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다가 문득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편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정작 그쪽에선 볼 수 없었다. 단편적인 부분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전체적인 조망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보려면 그 세계 밖으로 나와야 했다. 바다를 건너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무언가를 제대로 한다는 건 어디서든 쉽지 않은 일이었다.
C와 두 번째로 떠난 홍콩 여행은 훨씬 여유로웠다. 양보다는 질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나름의 취향이란 것도 생긴데다가, 나이와 체력이 반비례한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관심 있는 곳만 천천히 돌아다니다보니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느긋하게 시작된 일정은 대개 저녁 무렵에 끝났다. 그러나 검푸른 장막이 드리워진 창밖의 세상은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쳤다. 하루를 마무리하기엔 너무 이른 기분이 들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우리는 스카이라인을 감상하는 대신 해피밸리 경마장에 가보기로 했다.
경마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말’이었고, 그 다음이 ‘마권’이었다. 도박과 관련된 이미지로 인해 밝은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실제로 가본 경마장은 밝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강렬한 조명이 쏟아져 내려오는 푸릇푸릇한 잔디밭은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빽빽한 관중석은 남녀노소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분위기만 보면 축제나 다름없었다. 먹고 마시고 떠들다가 말들의 질주가 시작되면 수만 명이 한꺼번에 열광했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심장을 폭발적으로 두드려댔다. 둥둥둥둥!
흥분한 인파에 끼어 광적인 시간을 보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트램을 탔는데 어찌된 일인지 창밖의 풍경이 낯설었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한참 만에 알아차린 우리는 황급히 내렸다.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깔려 있는 적막한 거리엔 가로등 불빛만 겨우 빛나고 있었다. 큰길이었는데도 자동차는 물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행인이 한 명도 없는 광경을 처음 본 탓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막차가 끊긴 건 아니겠지? 반대편으로 건너가 다시 트램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가 보아온 야경이 홍콩의 한 부분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오색찬란한 조명이 아무데나 비추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몇 년 뒤에 C와 다시 방문한 홍콩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웬만한 관광지와 가까운 동네는 거의 다 가봤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다녀오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야경엔 더 이상 관심이 없었고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지만,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거리를 외면하는 것은 왠지 아쉬웠다. 혹사당한 다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카페와 식당과 주점뿐이었다. 앉아서 밤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간 우리는 전망이 좋은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전에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건물 외벽을 수놓은 조명은 형형한 눈동자처럼 빛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 위로 반짝이는 물줄기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흘렀다. 어느 곳으로 시선을 옮겨도 칙칙한 모습과 퇴색된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인상도 드러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풍경을 알고 있었던 탓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어색했다. 짙은 분장으로 맨얼굴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뇌리를 스쳤다. 야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어둠 속에 숨길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약간의 빛만 더해져도 초라한 현실은 삽시간에 화려한 환상으로 변신했다. 동트기 직전까지만 지속되는 짧은 환상이라는 점에서 홍콩의 밤은 꿈과 비슷했다. 누군가에게는 달콤하고 황홀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신기루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