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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20. 2023

눈치가 필요해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혼자 여행하는 것이 만만했던 적은 없었다. 자유롭다는 점과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단점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나홀로 여행을 고집했던 이유는 몇 개의 장점이 모든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새로운 상황과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형태의 불편함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불편함은 꽤나 다양했는데, 가장 흔하고 일상적이었던 것은 짐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배낭을 메던 캐리어를 끌던, 짐은 이동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무게가 나가거나 부피가 큰 짐은 어딜 가든 애물단지였다. 전 재산(?)이 담긴 짐을 들고 붐비는 장소를 통과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만큼 암담하진 않았다. 배설은 선택하거나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행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번갈아가며 다녀올 수 있지만, 혼자 있을 땐 짐을 다 가지고 들어가야만 했다. 공간은 대체로 비좁았고, 배낭을 걸어놓을 수 있는 옷걸이가 있는 곳은 드물었다.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바닥이 깨끗한 곳은 매우 희소했다. 





한번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대합실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급하게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오던 그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가 걸어가던 방향에는 암모니아 냄새를 독하게 분출하는 화장실이 있었다. 당황한 모습으로 서성대던 남자는 뭔가를 찾으려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다급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시선은 결국 나와 마주쳤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자신의 짐을 지켜봐달라고 부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후다닥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짐을 맡기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저럴까 싶어서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는 캐리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눈빛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처음 놓아둔 자리에 그대로 있는 캐리어로 다가간 그는 나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땡큐’라고 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막판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웃기 시작하자 그도 웃기 시작했다.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소리 없이 웃던 우리는 각자 버스를 타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배낭을 메고, 그는 캐리어를 끌고.     




여러 명이 정해진 일정대로 우르르 몰려다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가고 싶은 장소가 도심에서 떨어져 있거나 혹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엔 혼자 찾아다니는 것보다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투어에 참여하는 편이 나았다. 태국 여행 중에 참여했던 반나절짜리 투어에는 울창한 숲을 탐방하고 코끼리를 구경하고 강에서 뗏목을 타는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었다. 야생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흥미로웠으나 거기엔 결코 흥미롭지 않은 일도 끼어 있었다. 바로 화장실에 가는 일이었다. 건물이 없다보니 멀쩡한 화장실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드문드문 세워져 있어서 다음 화장실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마지막 화장실이니까 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다녀오세요.” 가이드가 가리킨 방향에는 나무로 얼기설기 지어진 화장실이 있었다. 한 칸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자화장실 앞에는 삽시간에 긴 줄이 만들어졌다. 얌전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에 있는 여자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괜히 나까지 긴장됐다. 줄아, 줄아, 제발 빨리 줄어라! 





길게만 느껴졌던 몇 분이 흐른 뒤, 마침내 여자의 차례가 되었다. 다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던 그녀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간절한 눈빛과 마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여행용 티슈를 통째로 내밀었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휴지 두 장을 뽑았다. 위급상황에 대처하기엔 너무 적은 양이었다. 나는 휴지를 왕창 뽑아서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던 여자는 차분해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민망함과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녀는 후다닥 가버렸다. 


그날 저녁, 숙소 앞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불쑥 제안했다. “너 아이스크림 먹을래? 내가 살게.” 달달한 디저트가 먹고 싶긴 했으나 음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위장엔 약간의 틈조차 없었다. 지금 아이스크림 먹으면 배탈 날 것 같아. 그녀는 악몽이 기억난 듯, 몸서리치며 말했다. “으으....배탈은 안 돼!”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할 것. 해가 진 이후에는 절대 돌아다니지 말 것. 이를 지키기 위해 밤에 도착하거나 출발하는 차편은 최대한 피했다. 그러나 대중교통 스케줄이 내가 원하는 시간이 맞춰져 있는 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어둠 속을 배회한 순간들이 있었다.


밤에 출발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면 피곤하기는 해도 위험하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밤에 도착할 때였다. 기차역이나 터미널 주변에 숙소가 있는 상황을 제외하면 릭샤나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했다. 새로운 장소에 막 도착한 여행자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같은 차를 타고 온 현지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혼자인 경우가 많았다. 


이쪽 혹은 저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행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힐끗힐끗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먼저 다가가는 쪽은 더 아쉬운 쪽이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황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다가오는 여행자를 보고 놀라거나 피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단한 통성명을 할 때도 있었지만 급할 땐 그마저도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행자들이 찾는 숙소는 모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동네까지만 가면 빈방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언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빛과 손짓, 지명만으로도 암묵적인 합의는 금방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우리는 일행이야. 





요금을 흥정하고 차에 오르더라도 안심할 순 없었다. 혼자인 것보다는 나았으나 둘이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범죄는 으슥한 곳에서 벌어지기 마련이었고, 현금과 신용카드와 여권을 가지고 있는 여행자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한 어둠 속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만난 여행자뿐이었다. 같은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소엔 그토록 힘든 연대와 협력이 이토록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일단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약속한 요금을 각각 절반씩 내고 나면 둘은 다시 하나와 하나로 나누어졌다. 긴장이 다소 풀린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준 다음, 하나와 하나는 각자의 길을 떠났다. 우연히 방향이 같을 때도 있었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적절한 거리만큼은 유지했다. 혼자 다니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혼자 다니는 여행자에겐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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