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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유정 Oct 15. 2023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

소요와 악다구니로 가득한 세계에선 잠깐의 휴식은 가능할지 몰라도 온전한 휴식은 불가능했다. 쉼표가 절실한 자에겐 조용히 쉴 수 있는 깨끗한 환경과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했다. 여행자를 위한 최소한의 편의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조건에 맞는 나라를 물색하다가 마음에 쏙 들어온 이름이 있었다. 라오스였다. 


태국을 경유해서 도착한 루앙프라방은 고색창연한 정취가 그득했다. 크거나 높거나 화려한 건물이 없는 풍경 속에는 싱그러운 초목이 펼쳐져 있었다. 숲이 도시를 품고 있는 것인지 도시가 숲을 품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곳에선 신경을 긁는 소음도, 마음을 분주하게 만드는 사건도 없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은 물론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들리는 것은 물 흐르는 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뿐이었다.


느릿느릿 배회하는 것이 그날의 일과였다. 신선한 바람을 맞고 싶을 땐 메콩강변을 산책했고, 사색에 잠기고 싶을 땐 사원을 거닐었다. 지나간 시간을 확인하러 박물관을 방문했고, 생동감 넘치는 일상을 관찰하러 시장을 구경했다. 겨우 며칠을 보냈을 뿐인데도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던 마음도 조금은 깨끗해진 것 같았다.      






루앙프라방에서 방비엥까지는 버스로 8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진흙탕과 웅덩이가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는 비포장도로와 위태롭게 구불거리는 산길을 달려서 도착한 방비엥은 중심거리를 둘러보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동네였다. 그러나 여행자를 위한 웬만한 편의시설은 다 모여 있었다. 수십 가지가 넘는 동서양의 음식을 모두 팔고 있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하루 종일 헐리우드 영화만 틀어주는 식당도 있었다. 넓은 마루를 보유하고 있는 카페 겸 식당은 여행자들의 아지트였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여행자들은 푹신한 베개와 쿠션이 있는 시원한 마루로 몰려와 TV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잤다. 배가 고프면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고, 배를 채우고 나면 다시 마루로 올라와 뒹굴뒹굴 시간을 보냈다. 


생체 리듬이 나른한 분위기에 적응하자 움직임과 반응이 느려졌다. 민감도도 낮아졌고 생각도 단순해졌다. 덧없어진 세상만사는 빈둥거리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국에선 상상도 못했을 게으름을 피우며 무위도식하던 어느 오후, 불완전변태를 통해 마침내 한량의 대열에 합류한 히피 복장의 여행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비수기의 방비엥에는 여행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흔했다. 겨우 며칠 머물렀을 뿐인데도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어쩌면 낯선 얼굴의 수가 더 적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늘어져 있던 뇌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라오스는 아무 때나 쉽게 올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휴식을 핑계로 빈둥거리기만 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여행은 시간과 돈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본전을 뽑으려면 누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누려야 했다. 먹구름처럼 몰려온 죄책감이 사나운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낭비’와 ‘허비’는 용납될 수 없는 단어였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경계해왔으나 그 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나는 탈피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한량이 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방비엥을 찾은 여행자들은 튜브나 카약을 타거나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투어에 참여했다. 그러나 물을 무서워하는 내가 굳이 물놀이를 시도할 이유는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그냥 혼자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어. 도보로 갈만한 장소는 시장과 동굴 정도였다. 활기가 팔딱거리는 시장에서 잠들어 있던 오감을 억지로 깨운 뒤, 탐짱이라 불리는 동굴까지 걸어갔다. 경사가 급한 계단의 꼭대기에 자리한 동굴은 입구에서부터 서늘한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걸으며 종유석을 구경하려면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활동을 재개한 것도 모자라 긴장까지 했던 근육들은 당기거나 후들거리는 방식으로 아우성쳤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뿌듯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과일주스를 구입했다.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준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동네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보니 얕은 물가에서 놀고 있는 몇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가늘고 길쭉한 나무막대기를 물에 넣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낚시놀이였다. 


실제로 뭔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냥 흉내만 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끊임없이 조잘대며 웃어댔다. 아무것도 건져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다들 재밌어 보였다. 일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놀이는 스스로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노는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어도 자기가 만족스러우면 그만이었다.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다보니 내 감정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탐짱에서 느꼈던 뿌듯함은 일종의 안도감이었다. 동굴을 방문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했다는 의미였고, 그 사실만으로도 시간을 어영부영 흘려보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휴식이 필요해서 시작한 여행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왠지 껄끄러웠다. 바쁘게 사는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이 동의어가 아닌데도 나는 이 둘을 혼동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지 않거나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득이 없는 건 괜찮아도 손해를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손해는 언제나 후회와 억울함이라는 응어리를 남겼다.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응어리는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방비엥에 도착한 이후의 행적들을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없었다. 잠을 자는 것은 ‘잠을 자는’ 행위였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은 ‘멍하니 앉아 있는’ 행위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행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효용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누워서 빈둥거리는 일이었다. 몸은 편해졌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자체로 만족하면 될 일이건만, 금세 조급해지거나 안달이 났다. 유의미해질 수 있는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닐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덜 후회스럽지 않을까.     





쉬는 행동에서조차 무언가를 얻어야 안심이 되는 모습과 대면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어떤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어떤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모르는 채로 살아왔었는지. 쓸모가 없다고 의미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순간들을 알차게 보내야 할 이유도, 모든 상황마다 실속을 챙겨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 편히 쉬기 어려웠던 까닭은 여행의 목적을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검열하거나 비판하거나 합리화시키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마음은 습관처럼 굳어진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만 얻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해야 했다. 불편했던 것이 편안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어색했던 것이 익숙해지려면 노력이 필요했다. 조급해질 때마다 게으르고 느려져도 괜찮다는 주문을 외우기로 했다. 분주해질 때마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기로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비닐봉지에 담긴 주스를 다 마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 외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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