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이 정도의 어른을 읽고
차분한 그의 산문집을 보고
남형석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남형석이란 이름은 그의 산문집이 나오고 알았다. 브런치 어플로는 냐묭이란 필명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편파적인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기자는 없고 기레기만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항상 들었다. 그런 와중 드문드문 만난 나묭님의 글을 보면 이 분은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기자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의 문체는 다정하고 따뜻했다. 브런치로는 그의 글을, 인스타로는 그가 직접
꾸민 춘천의 첫 서재 공간으로 그를 흐릿하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취향이 날 것을 채운다"는 챕터에서 그는 흐릿한 것이 좋다고 말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작가에 대한 이미지가 보다 선명해졌다.(작가님의 취향으로부터 멀어졌다.)
장기하의 산문집 '상관없는 것 아닌가?를 읽을 때,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을 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장기하의 글을 읽었을 때는 낄낄 거리며 유쾌하게 읽었었다.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은 내 생각과 비슷한 친구가 차분한 어조와 정제된 단어로 단정한 일기장을 보여준 느낌이다. 서문에서 작가는 이 책은 자유롭고도 불온한 체험기이자 한편으로는 몸부림치지 않고 그저 살아진 옛날에 대한 여과 없는 반성문이라고 했다.
반 성 문. 산문집을 읽고 이렇게 내 생을 반추해보긴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 책은 세 장으로 되어 있다. 작가의 말을 마중과 배웅이란 단어를 쓴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각 장의 구성은 이러했다.
1장-당연하다는 착각,
2장-어른스럽게 울기,
3장-자람과 모자람으로
1장에서 " 얼만큼 벌어야 평생 먹고살 수 있을까?" 챕터와 "당신을 질투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꽃이 되고팠던 날들을 보내며"가 좋았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과감하게 긴 휴직을 하고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작가의 용감함은 나에게 없다. 작가님과 달리 용기는 없지만 돈에 대한 작가의 말에는 동의한다. " 돈 없이는 못 살겠지만 돈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생산하지 않고도 편하게 먹고살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정신은 노화하고 몸은 부패할 것 같다. " 생계형 교사인 내게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다. 저 사람은 돈이 많아서 취미로 교사하는 사람이야라고 했을 때 속 편하게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했었다. 생각지 못한 민원이 닥쳤을 때 에잇 이까짓꺼 그만두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당장의 카드값과 내가 돈을 벌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내가 이 직업이 없어도 생계에 하등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넉넉한 부만큼 인자한 교사가 되었을까? 아니면 조그만 일에도 나의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고 쉬이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 가정을 생각지 못할 만큼 철저한 생계형 교사로 만들어주신 그 어디쯤 존재하는 신에게 감사를 드려야 될 것
같다. 나는 아주 팽팽하진 않지만 적당한 긴장을 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생계형 교사이기 때문이다. 월급날을 목표로 사는 인간이지만 그날을 위해 내게 필요한 연수를 찾아 듣고, 내 영혼을 살 찌우기 위해 책을 읽는 살짝 바지런한 인간이기도 하다. 우리 딸에게 넉넉한 부는 넘겨주지 못하지만
내 안에 약간 들끓고 있는 생산성은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
"꽃이 되고팠던 날들을 보내며"란 장에서는 작가는 다섯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젊음이 그립니?
아직 기자가 좋니?
경쟁심은 살아있니?
여전히 꽃이고 싶니?
그래서, 40대에는 어떻게 살 거니?
다행인 건지 작가는 젊음이 그립지 않다고 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를 칭하던 키 크고 날씬한 애라는 수식어가 약간 그립긴 하지만
마음씀이 옹졸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직도 기자가 좋니?라는 물음에 나는 아직도 교사가 좋니?라는 물음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았다. 정말 힘들었다면 생계고 나발이고 때려치웠을 것 같다. 아직까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yes다. 타 직업에 비해 그림책 연수와 다른 연수, 좋은 모임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직업군 같아서 좋다. 안 좋은 점은 다른 직업군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 세계 안에 갇힐까 봐
두려운 점은 있다.
경쟁심이 살아 있니?라는 질문에 작가는 예전보다 많이 사그라졌다고 한다. 타인을 향한 승부욕을 애써 잠재우다 보니 나
스스로를 향한 승부욕까지 함께 잠들어버릴 겄다는 같다/ 그저 나를 멈춰 세우고 다듬겠다는 핑계로 발전과 성장의 연료마저도 공급 중단하고 사는
건 아닌가 문득문득 돌아보게 된다는 구절이 있다. 나 또한 작가만큼 질투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 질투 덕분에 나는 꽤 높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잘 받은 내신 성적 덕분에 IMF 시절 갑자기 치솟았던 교대 인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과한 질투심이 지금의 밥벌이를 만들어줬다. 그러나 교사가 된 지금은 승진 욕구가 없어서인지 경쟁심리가 사라졌다. 지금의 작가님과 내 마음속의 질투심의
크기를 감히 비교해보면 내 질투심이 크기가 더 작을 것 같다. 하지만 질투심이 다행히? 제로는 아닌 것 같다.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표현해준 작가의 문장에 질투심이 일렁인다.
질투심이 없어 편안해졌지만 발전 없는 삶을 살 것 같아 불안하다고 밖에 나는 내 상태를 표현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유려하게 표현했다.
"그저 나를 멈춰 세우고 다듬겠다는 핑계로 발전과 성장의 연료마저도 공급 중단하고 사는 건 아닌가 문득문득 돌아보게 한다."
아! 나도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
여전히 꽃이고 싶니?라는 질문에 작가는 타고난 기질 탓에 여전히 주목은 받으며 살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꽃보다는 누군가를 꽃피울 거름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가지고 있는 자양분이 약해서 누군가의 거름은 못되겠지만 그 누군가를 덮어줄 수 있는 한 줌의 흙 역할을 해주고 싶다. 그 흙이 비단 내 딸에게만 미치는 미미한 존재이고 싶지는 않다. 1보다는 1+0.01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이 글은 봄이 떠오르는 춘천에서 날아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청주에 도착했다. 40대 생계형 교사인 나는 긴긴 세월을 교사로서 살아가야 한다.
퇴직을 한 뒤 제2의 인생은 글과 책이 머무는 공간에서 머무르고 싶다. 몸을 쓰는 사서 보조일, 무료 글방 보조일 같은 일을 하고 싶다.
(속마음은 글 선생님을 하고 싶지만 내게서 배운 학생은(학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어와 술어가 안 맞을 것 같다. ㅎㅎ) 방학 동안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림책 연수를 통해서 좋은 그림책을 만날 수 있어서 생계형 교사의 일상은 제법 달콤하다. 더 이상 비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공감능력이 없는 저 높으신 양반들은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공감 무능력자'에서 탈출하려면 챕터에 자세히 적혀있다. 허긴 이런 책을 읽을 정도의 철학을 가진 이들이면 사람이 죽은 집 앞에서 안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홍보용 포스터를 절대 국민에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