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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거나 Sep 19. 2022

바람, 먹어보고 싶다

통합 교과서에 나오는 기차 게임을 한 뒤 잠자리 잡기 게임 그리고 피구를 연달아하고 와야지 하고 수업 계획을 짰다.

1교시는 OHP에 인쇄된 잠자리를 유성 매직으로 색칠을 하고 손목에 잠자리 팔찌를 만들었다. 색칠할 면적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20분이면 다 끝나서 운동장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40분에 쉬는 시간까지 다 쓰고 나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자신이 만든 잠자리 팔찌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내 팔찌 봐라 하면서 자랑을 하고 다니길래 내심 뿌듯했다. 그런데 팔찌를 끼고 운동장 나가서 잠자리 잡기 놀이를 하자고 하니 여기저기서 "안 끼면 안 돼요? " 하는 아우성이 들렸다. 게다가 기차놀이를 하려고 나가려는데 옆반 동학년 선생님이 튼튼한 노끈으로 만들어 준 기차가 연구실에 보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임기응변이 약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다행히 내 서랍에 긴 고무줄이 있어 급하게 잘라서 운동장을 나갔다.

스피디하게 기차놀이를 진행하면 아이들도 나도 신나겠지만 혹시나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면 조금 더 멀리 있는 콘을 돌고 오고, 이기면 가까운 콘을 돌고 오자고 했다. 아이들은 릴레이 게임이 아니라고 일러줬음에도 불구하고 "야 빨리, 빨리"를 외쳤고, 나는 "조심! 조심!"을 외쳤다. 스피디한 게임을 하고 싶은 아이들에게는 고무줄 기차는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자신의 몸만 필요한 달리기를 실컷 하고 싶었을 것이다. "에잇, 재미없어 시시해"라는 말들이 나와서 한 번만 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하나 싶기도 했다. 나는 고무줄 기차놀이에서 기관사(앞줄에 서는 사람)는 공평하게 한 번 씩은 다 해봐야 해! 하고 마음먹은 지라 꿋꿋하게 아이들의 눈총을 견디며 기차놀이를 2라운드까지 했다.

그다음 잠자리 잡기 게임을 했다. 술래를 정해서 시간 안에 잠자리(술래가 아닌 다른 아이들)를 축구 골대로 잡아오는 게임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잠자리를 많이 잡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번호대로 술래를 정해서 게임을 시작했다. 고무줄도 없으니 아이들은 날개에 모터가 달린 최신식 잠자리처럼 운동장을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 다녔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될수록 "너무 더워요." " 교실 들어가요!" "물 먹고 싶어요" "피구

해요" "피구말고 놀이터 가요!" 하는 요구 사항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요구사항을 듣는 찰나 L과 Y과 장난치다가 Y가 넘어져서 펑펑 울고  있었다. 다행히 울음소리에 비해 상처는 없었다.  우는 Y를 달랜 후  나는 "자꾸 장난치고 말 안 들으면 당분간 운동장 수업 안 할 거예요. 안 하고 싶어요?" 하고 나는 반 협박을 했다. 운동장 수업을 안 하는 것은 끔찍한지  빗발치는 요구 사항이 잦아들었다. 잠자리 잡기 놀이를 1번부터 12번까지 술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5분 동안 피구를 하고 놀이터에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 지켜보다가도 운동장 한편에서 6학년 체육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줄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동작에 맞춰 준비 운동을 절도 있게 했다. 담임 선생님 지시 하에 체계적으로 줄넘기 수업이 진행되었다.

'아 부럽다. 나는 몇 년 차인데 아직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이런 체육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지컬은 완벽한 체육 선생의 모습을 갖췄으나 흐지부지한 내 수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가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더 놀게 했다가는 월요일부터 예고한 받아쓰기 시험을 못 볼 것 같아서 " 자 그만 이제 교실로 가요!"하고 전자 호루라기를 삑

눌렀다. 오늘따라 호루라기 소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똥구멍 사이로 힘없게 새어 나오는 방귀소리 같았다.

운동장 수업을 한 아이들 이마는 땀이 주룩주룩 했다. 내 등에도 땀이 또르륵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오자마자 더웠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이들이 더워하니 에어컨을 켜려고 창문을 닫으려고 하니 바이 쏴하고 불었다. 받아쓰기를 하기 위해 책상을 정비했다. 나름 서로 보지 않게 하려고 한 줄로 책상을 맞추긴 했지만 나쁜 마음을 먹으면 다 볼 수 있는 가시거리에 있다. 무엇을 1번으로 부를지 23개의 얼굴들이 내 입만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를 불러줬다. 연필 소리가 서걱거린다. 그리고 교실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추석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붙인 작품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받아쓰기를 할 때 부는 바람이 좋았는지 "시원하다", "야 좋다!"하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티키타카를 했던 내 노고를 말갛게 털어내 줄 상쾌한 가을바람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 반 장난꾸러기가 "와 바람 진짜 시원하다. 바람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라고 했다. 똘똘한 J가 "야 어떻게 바람을 먹냐? 하고 핀잔을 줬다. J는 핀잔을 줬지만 나는 아이가 툭 던진 말이 멋졌다. 반짝이는 보석과 같은 문장을 내게 툭 던져줬다. 0점부터 200점까지(글씨가 반듯한 아이는 100점이 아니라200점

처리-선배 교사 아이디어 차용) 점수를 매기는 받아쓰기 수업시간이었지만 그 문장 하나 덕분에 나는 시를 쓰는 수업처럼 느껴졌다. 싹을틔웠습니다를 튀웠습니다/ 티었습니다./로 적은 현실을 보고 이내 현실을 직면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름다운 시와 바람과 노래가 흐르는 것 같았다.

흐지부지한 수업을 하며 한없이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가끔 아이들이 이렇게 톡 쏴주는 청량한 맛에 이 직업을 하고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든다.

내일은 13번부터 23번까지 잠자리 잡기 놀이를 계획했다. 얼마큼 또 우당탕한 하루가 펼쳐질진 모르지만 먹음직한 바람이 부는 하루가 펼쳐졌으면 한다. 아랫녘에는 태풍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게 내일은 먹고 싶은 바람이 부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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