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화요일 7시 30분 소리마루 20주년 공연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고 열린 도서관에서 서로 책을 읽다가 공연장소로 갔다. 공연장을 들어서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세령산으로 공연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20주년 축하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 영상 속에는 마흔다섯 살 된 초창기 회장님의 모습이 있었다. 마흔다섯, 지금의 나와 세 살 밖에 차이나 안나는 젊은 회장님의 얼굴을 보니 소리마루와 함께한 지나간 내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우연히 교사 국악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연히 공문으로 국악동아리 모집한다는 것을 보았고, 친구와 나는 무슨 마음인지 모르나 가야금을 지원했었다. 그런데 회장님이 가야금은 인원이 다 찼으니 대금 동아리로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대금이 무슨 악기 인지도 몰랐으나 우리는 그때 대금 동아리를 들어갔다. 기억을 떠올리면 얼핏 2008년 경인 것 같다. 소리도 안나는 플라스틱 대금을 가지고 꾸역꾸역 삼주를 다녔다. 소리가 안 나서 짜증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미련 곰탱이처럼 빠지지 않고 다녔다. 소리는 여전히 나지 않지만 무턱대고 68만 원을 주고 대나무 대금을 사버렸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6공을 다 막으면 나는 '임'소리를 냈고 아리랑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방학 동안 2박 3일 집중 연수를 하며 낮에는 악기로, 밤에는 술과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연수 마지막 날은 시립국악단 강사님들의 멋진 연주를 들었던 과거도 주마등처럼 스쳤다. 긴 세월을 함께 했기에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대금에 쓰일 청을 구하기 위해 직접 대나무 밭에 간 일, 박대기 기자가 폭설로 스타 기자가 되는 날, 월정사에서 연수를 마치고 폭설을 헤치고 무사히 청주로 돌아왔던 일, 아리랑 밖에 연주할 수 없던 우리들이 국악관현악곡 '축제'를 합주하면서 뿌듯했던 기억,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제법 크게 했던 2019년 무대 등 소리마루와 함께 한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매주 화요일 대금을 배우러 간다. 11월 26일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공연을 할 예정이다. 소리마루가 20주년을 버텨준 것처럼 나도 아직도 대금을 하고 있다. 2008년 초보 시절보다 내 대금 소리는 나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저취 소리를 잘 내지 못한다. 정간보에 적힌 디테일한 정보를 읽을 수 없고, 오선지에 덧줄이 넘어가면 잘 읽지 못한다. 그리고 공연을 할 때는 오선지에 음표 하나하나에 ' 중, 임, 무, 황, 태'음을 연필로 빼곡히 적어야 연주할 수 있다.
아파트에 살고 이웃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기 때문에 층간 소음을 낼 수 없어 연습을 못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3년간 동아리를 하지 못했어요. 충주에 발령이 나서 4년 동안은 소리마루 동아리를 못했어요.라는 변명을 이리저리 해봐도 내가 대금과 함께 한 세월은 기던 아기가 번개처럼 뛸 수 있는 아이가 되는 만큼의 긴 기간이다. 가방 속에 쏙 숨기고 다니면서 연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긴 세월 소리에 비해 허술한 내 대금 소리가 나는 여전히 몹시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도 왜 내가 이 악기를 연주하냐고 묻는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충주에 근무를 했을 때도, 청주 언제 와? 공연복을 미리 마련했으니까 청주 오면 얼른 합류하라고 멀리 있던 나를 챙겨줬던 선생님, 레슨 전에 보이차를 타 주시는 사부님,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누며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대금 동아리 선생님들, 연수 때마다 격려해주는 운영진, 합주를 하면서 같이 음악을 만들어가는데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다른 악기 파트의 사람들, 짠 보수에도 불구하고 항상 각 파트별로 최선을 다해서 봐주시는 시립 국악단원 강사님들. 그들이 아직도 여기에 있기에 나도 아직도 여기에 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내게
" 아직도 대금을 해? 아직도 독서모임 해?" 하고 물어본다. 겸연쩍게 "응"하고 대답하면 그들은 내게 대단하다고 말해준다. 부끄럽게도 내 대금 소리를 들으면 대단하다는 말이 쑥 들어갈 것이다. 내 대금 실력은 아직도 초급을 살짝 넘어서는 단계이다. 대금 초기 멤버가 나 빼고 바뀌었지만 나는 충주를 갔다 오고도 아직도 대금 동아리에 머물러있다. 아직도 독서모임을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으며, 지금은 멤버 수가 줄었지만 글쓰기 모임에 아직도 참여하고 있다.
2년 뒤에 청주에서 충주로 터전을 옮길 계획이다. 그때 나는 아직도 대금을 하고 있을지, 이제는 대금을 안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아직도라는 단어 뒤에 긍정적인 서술어가 붙는 내가 되길 희망한다.
10월인데도 아직도 날씨는 여름 같았다. 비가 온 뒤는 날씨가 선선해진다고 한다. 생각보다 길게 질척거렸기에 오래 머물던 여름이 지나감이 아쉽지 않다. 내일은 또 대금을 하러 가는 날이다. 내일은 내 입김을 통해 나오는 대금 소리가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슝슝났으면 한다. 신이시여! 대금에 대한 저의 열정이 아직도 부족할까요? 이제 좋은 소리가 나게 해 주세요.! 특히 11월 26일은 특별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