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성실함

by 아무거나

나의 2020년도 업무는 평가였다. 평가위원회를 열고 하는 것도 평가 담당이 하는 곳도 있다지만 운 좋게도 나는 연구부장 그늘에 쏙 숨어서 참석만 하고 회의 결과를 반영해 계획만 세우면 되었다.

학급을 운영하는 것은 매번 달라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역동적이고 순발력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교 업무는 창의력, 기획력 같은 것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는다. 2020년이 되었으면 아래한글로 2019년을 2020으로 찾아 모두 바꾸기를 하면 그것이 2020학년도의 계획이 되어 버리는 시답지 않은 마술 같은 것이 학교일이다. 그런데 요놈의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코로나로 평가 방침이 달라졌고 그것에 준해 새로운 계획서를 세워야 했다. 영혼 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새로운 지침을 알아보고 새롭게 해 나가려니 살짝 억울했다. 기존처럼 나가야 하는 시즌에 성적표가 나가고 하면 좋으련만 망할 놈의 코로나! 교육청은 코로나 상황에 따라 평가를 안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제법 성실한 집단이 모인 곳이라서 그러할까? 기존에 갇혀있던 틀을 깰 수 없는 나같이 콱콱 막힌 집단이라 그러할까? 주변 친구들, 주변의 지인의 학교를 총동원해도 평가를 하지 않는 학교는 내가 아는 한 없었다. 그렇게 내 업무는 며칠 전 드라마로 치면 절정에 접어들었다. 학년의 모든 생활 통지표와 종합 일람표가 내게 도착했다. 출결, 교과목 미기재와 같이 감사에 크게 걸릴 것만 검토해서 결재를 휘리릭 받아야지 생각했다. 이 많은 것을 다 볼 수 없어. 큰 것만 보자. 중요한 것 큰 것만 보자 다짐했다.

젠장, 그렇게 다짐했는데.....

오타들이 자꾸 눈에 보인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음이 보인다.

여러 가지인데 여러가지라고 쓴 것이 보인다.

열심히를 열심을 한다가 보인다.

띄어쓰기를 두 칸 한 것이 보인다.

문맥상 매끄럽지 않음이 보인다. 물음표를 하고 싶다. 하지만 오타가 아니기에 아주 소심하게 연필로 물음표를 붙여줬다.

나는 쓸데없는 나의 성실함에 30 학급이 넘는 반의 성적표에 포스트잇으로 하나하나 난도질을 해 놓았다. 저번 주부터 주말까지 어제 새벽까지 달려 연구부장에게 제출했다. 서류 뭉치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보고 연구 부장과 교감선생님의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각 학급 선생님들이 수정을 하고 다시 제출하셨다.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내게 칭찬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다 봤대?" "세상에 띄어쓰기까지...?" "틀린 글자 발견해줘서 고마워. 꼼꼼하게 못 봐서 미안해. 자기 엄청 고생했겠다."

아.... 그러려고 그런 거 아닌데... 내가 남에게 꼼꼼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나의 남의 편이 배를 잡고 웃을 일인데.... 내가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본건 아닐까? 정작 큰 실수는 못 봐준 것이 아닐까? 지나가는 칭찬들에 머리가 띵하다. 눈이 너무 침침하다. 찜찔기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얼른 왔으면 좋겠다.

왜 나는 쓸데없이 성실한 것일까? 영혼을 불 태울 일이 아닌데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했을까? 정작 나는 남의 것을 봐주느라 내 똥을 살피진 못했다.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전 찬찬히 나의 흔적들을 살펴보아야겠다.



교감 선생님이 내게 다가온다. "승진시켜 줄게 돌봄 부장 어때?" 하면서 지나가신다. 권위적이지 않아 자기 의견은 못 내고 큰 일을 하는 부장 자리들은 텅텅 비니 교감 선생도 머리가 아플 것이다. 하라고 말은 못 하겠고 진심을 농처럼 툭 던져보는 그가 애잔하긴 하지만 나는 꿋꿋이 버틸 것이다. 재작년 돌봄 업무로 나는 심신이 지쳤었다. 아이들 모집, 강사 공고 , 선발, 심사

, 계약서 작성, 월급... 모든 행정처리를 내가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올해도 돌봄 전담사들은 교사가 차려 준 밥상에 아이들만 돌볼 것인가 보다.

"교감 선생님 , 차라리 평가할게요!"

스멀스멀 올라오는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또 쓸데없는 성실함을 발휘하여 내 눈을 혹사시킬 까 봐, 밴딩이 소갈딱지 마인드로 남의 오타를 발견할까 봐, 나 자신이 무섭다.

올해는 어떤 업무와 학년을 맡게 될지 모른다. 2021년에는 나의 성실함이 의미 있게 발현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올해는 더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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