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강아지 Ⅰ

by 아무거나

우리 집 뽀야는 16년을 살다 갔다. 종은 요크셔테리어에 나이가 들어도 동안 얼굴을 유지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던 예쁜 강아지였다. 우리 뽀야는 몹쓸 질투심으로 본가에서 쫓겨나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갈색 털에 윤기가 촤르르 흐르고 다리가 불편한 자기 친구가 주인에게 더 사랑을 받는 것이 질투가 났는지 나나를 안아주기만 하면 뽀야는 계속 짖었다고 했다. 그래서 본 주인이 엄마에게 뽀야를 키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여 우리 엄마는 뽀야를 우리 집에 데리고 왔다. 얼마나 우리 집 식구들 전부가 개에 문외한이었는지 그 쪼그만 개를 이틀간 밖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큰 진돗개가 집을 지킬 때 묶여 있는 것처럼 2.5킬로에 요키를 밖에다 묶어 두었으니 가정집에서 고이 자란 뽀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틀을 묶어두고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우리 뽀야는 이제 실내로 어왔다고 이 모든 뽀야의 우리 집 입양 경위를 나는 전화로 들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이 아파트를 팔고 이상한 주택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우리 집엔 피아노도 있고, 너무 많이 사서 책을 좋아하는 나도 읽기 버거웠던 전집 세트도 꽉꽉 채워진 그냥 평범한 가정에 딸만 셋인 집에 첫째 딸이었다. 첫째라서 엄마는 내가 체르니40번을 다 칠 때까지 피아노 학원도 보냈고 미술 학원도 잠깐 보내줬다. 영어도 국민학교 6학년 때 윤선생을 해줬다. 동생들도 언니만 해주냐고 불만이 많아 동생들도 다니긴 했지만 내가 다닌 기간들에 비해 짧았다. 약간만 투자해도 좋은 결과를 뽑아내는 나는 엄마의 자랑이었다. 나는 중학교때는 전교에서 거의 한 자리 수의 등수였고 도에서 1등도 해본(고등학교 때는 전교 20등 내외로 좀 많이 떨어짐) 암기왕, 공부 잘하는 아이였지 가난한 집 첫째 딸은 아니었다. IMF로 우리 아빠는 나갈 직장을 잃어서 가난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을게다. 부모님이 내게 티를 내지 않으신 건지, 공부만 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않은 나의 둔감함 때문인지, 기우는 가세에도 공부 잘하는 나 때문에 기운이 나셨던 건지 모르지만 나는 가난함 속에서도 가난을 느끼지 못했다. 스카이를 갈 점수는 못됐지만 서울의 상위권 사립대 4년제는 들어갈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우리 집 형편도 모르고 서울의 사립대를 내가 진학했다면 나는 나의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이 공부만 한 멍청이는 욕심도 나지 않았 독립의 로망만 채워주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학교면 된다는 생각으로, 교사가 될 뜻은 없지만 친척들의 권유로 나는 국립 중에서도 등록금이 제일 싼 교대를 가게 되었다. 등록금도 싸고 장학금도 받았기에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닐 일은 없었다. 본가 우리 집은 아파트를 팔고 허름한 주택으로 가는 번잡한 상황에서도 내가 있는 곳은 나의 본가와 멀기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의 가난은 내게 와 닿지 않았다. 런데 전로만 전해 듣던 뽀야가 들어온 나의 집을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는 알았다. 우리 집이 많이 가난해졌다는 것을, 그렇게 처음으로 가난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눈을 찔끈 감아서 없는 풍경인 것처럼 하고 싶지만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질 가난이 아니었다. 썩 유쾌하지 않은 장소에서 나는 쪼끄맣고 앙칼진 강아지 뽀야를 처음 만났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가난한 집과 어울리지 않게 부티나게 생긴 뽀야를 보니 우리의 가난이 더 부각되어 보여 밉기도 했다. 어릴 때 내 앞을 가로막은 큰 개 때문에 개 공포증이 있기도 했다. 부티나게 생긴 게 미워서, 나를 물까 봐 무섭기도 해서 나는 며칠 동안 뽀야를 피해 다녔다. 앙칼지게 짖으면서도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는 요 녀석이 신기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대어 보았다. 물지 않았다. 게다가 웃는 것 같았다. 속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는 작은 생명 뽀야에게 나는 서서히 매료되어 갔다. 손을 대지도 못했던 내가 뽀야의 몸을 부비적 거리며 우리 사이는 가까워졌다. 비록 방학 때만 볼 수 있는 사이긴 해도 말이다. 잘 사는 이층 양옥집에서 쫓겨 와 가난한 우리 집으로 온 뽀야는 그렇게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좁은 시멘트 마당이 있는, 억지로 세 개로 나눴던 좁은 세 개 방, 에어컨 하나면 거의 꽉 찼던 거실, 쓸데없이 커서 외풍이 심한 화장실, 남의 집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안방

대학생이던 내가 교사가 될 때까지 귀티 나는 뽀야는 내가 처음으로 가난을 직면한 장소에서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