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야는 나의 가난이 직면한 장소에서 8년을 더 살고 도심의 외곽의 아파트로 우리 식구와 이사를 가게 된다. 외곽에 지어 땅값이 싸서 그러한지 26평이라고 하지만 실평수는 39평에 가까운 넓은 집이었다. 우리 집은 아니고 월세집이었다. 엄마의 기침도 늘어나고, 뽀야도 켁켁 대는 것이 환기가 잘 안 되는 집 탓인 것 같은 생각에 옮겼다. 빚을 내고 집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20대 후반의 어린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탈출한 것이 도심의 외곽에 있는 5년 된 아파트였다. 월세였지만 평수도 넓고 집다운 느낌이 들어 좋았다. 우리 딸을 데려가기도 부끄럽지 않은 공간이었다. 비록 우리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리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우니 나는 방학 때마다 내려가는 나의 본가(친정)가 행복했다. 5분만 걸어가면 시립 도서관이 있어 동생의 대출증으로 책을 잔뜩 빌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우리 딸의 육아는 우리 딸을 나보다 꿀 떨어지게 보는 엄마와 아빠에게 맡겼고 나는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뽀야도 좁은 집보다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집이, 인위적이지만 산책로라고 꾸며진 아파트 정원을 거니는 인생이 행복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개의 1년은 사람의 10년과 같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 뽀야는 쓸쓸해 보였다. 부모님의 예쁨을 다 빨아들이는 우리 딸에게 질투가 났는지 우리 딸을 보면 짖었다. 어린 딸은 자기에 대한 시기심 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쫄쫄 쫄 따라다니다가 앙칼진 뽀야의 울음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폐협착층이 진행되는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사료는 잘 안 먹었지만 더 먹지를 않고 켁켁하는 소리가 새벽에도 간간이 들려왔다. 간간히 들리던 켁켁 소리는 계절이 지나는 횟수만큼 더 깊어졌다. 그리고 뽀야는 우리 딸이 방학 때마다 뺏아가던 엄마 아빠의 사랑에 대한 질투를 거뒀다. 더 이상 짖지 않았다. 가래를 뱉고 싶은데 뱉지 못한 사람처럼 숨을 쉬고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뽀야가 베란다를 볼 때면 좁은 집의 옥상에서 일광욕을 하던 뽀야가 생각났다. 좁은 집에서 유일하게 넓었던 공간은 옥상이었다. 내가 뽀야를 따라 옥상에 올라가면 뽀야는 이제 왔어?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개처럼 옥상을 마음껏 누비고 햇살을 쬐고 옥상을 스스로 내려갔다. 그랬던 뽀가 베란다를 멍하니 봤다. '뽀야 너는 그때 그 집보다 지금이 행복하지 않니? 좁았지만 젊었고 마음껏 옥상을 뛰놀던 네가 좋았던 거야? 뽀야? 기침해서 폐가 많이 아프지 않니?' 내 말이 전달되지 않을 테지만 나는 뽀야를 쓰다듬어 주었다. '뽀야 ,누나 이번 방학에 또 내려올게 잘 있어. 그때도 건강해야 돼!'하고 나는 딸을 데리고 나의 집으로 다시 복귀했다.
동생이 뽀야가 기침이 더 심해진다고 했다. 부천에 유명한 수의사가 있는데 한약을 먹여서 폐협착증이 좀 나아진 개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 집 막내는 영상 편집 때문에 너무 바빠 시간을 뺄 수 없고 운전을 둘 다 못했던 탓에 나는 남편에게 부탁했었다. 나는 평일이라 갈 수가 없고 우리 동생과 남편이 뽀야의 약을 지으러 갔다. 남편은 개에게 한약을 지어주려고 바쁜 사람을 오고 가게 하냐고 한 가득 짜증을 냈으나 운전을 못했던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나는 그때의 남편의 태도가 아직도 적잖지 않게 서운하다. 한약을 짓고 우리 동생은 캐리어에 뽀야를 안고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기차 안에서도 뽀야가 켁켁대는 바람에 우리 동생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세 시간을 좌석에 앉지도 못하고 입석처럼 타고 갔다고 했다.
차도가 있길 바랬다. 월 50만 원이나 하는 한약이었다. 동생은 차도가 있는 것 같다고 초기에 말했다. 하지만 한약을 다 먹여도 우리 뽀야는 숨 쉬고 내뱉을 때 힘들어했다고 한다. 네블라이저 기계를 살까도 했지만 한약값도 비쌌고 우리는 월 13만 원에 대여하기로 했다. 한약을 지은 금액도, 네블라이저의 비용도 우리는 부모님에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뽀야는 아기 오리의 각인효과처럼 자기를 데리고 온 우리 엄마가 없으면 잠을 잘 못 이루는 엄마 바라기였다. 그런데 부모님은 강아지를 예뻐하기만 했지 강아지가 필요한 돌봄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았다. 그리고 동물에게 쓸 돈의 한계치를 협소하게 정해 놓은 것 같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블라이저를 써도 한약을 먹여도 뽀야의 병은 낫지 않았다. 아픈 개는 식단 관리도 잘해야 돼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내 동생이 뽀야에게 맞는 음식도 곧잘 만들어주었다. 고기를 먹고 싶어 했지만 개를 위해서 주지 않았다. 아프고 기운은 없지만 우리 동생들의 노력들로 우리 식구가 오면 꼬리를 흔들고 고기 냄새가 나면 약해진 이에도 먹고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 뽀야답게 살아갔다.
따르르릉 따르릉 수업 중에 우리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인데 왜 전화를 하고 그래? 하면서 난 끊어 버렸다. 그런데 좀처럼 그만두질 않아 나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뽀야가 죽었어. 우리 뽀야가 아침에 고기를 구웠는데 먹고 싶다고 기웃거리다가 아일랜드 식탁이 무너져서 언니 우리 뽀야가 죽었어.. 고기가 뭐라고..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저 좋아하는 고기나 실컷 먹일걸... " 아픈 뽀야가 아파서 죽지 않고 사고로 죽었다. 나는 학년 연구실에서 동생과의 전화를 받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가서 꾹 참고 수업을 하고 싶었지만 슬픈 감정을 아이들 앞에서도 누를 수가 없었다.
"얘들아 미안해, 오늘 선생님 강아지가 죽어서 잠깐만 울게. 이해해줘"하고 나는 어린아이들 앞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수업을 하고 아이들을 하교시켰다. 당장 갈 수 없는 먼 거리, 아이들이 있어서 연가도 편히 쓸 수 없는 처지, 뽀야의 상실을 나는 먼 거리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된 뽀야를 화장하고 챙겨주는 것은 모두 동생 둘이 알아서 했다. 그리고 뽀야를 화장한 뒤에 뽀야 구름이 뜬 사진을 내게 보내줬다. 화장을 하고 나온 뒤에 하늘을 보니 뽀야의 뒷 모습을 닮은 구름이 몽글몽글 떠 있었다고 했다. 천사같은 뽀야가 하늘 나라로 정말 간 것 같았다.
뽀야가 떠난 지 4년이 넘는다. 나는 담담하게 이 글을 적어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방학 때마다 짧게 만났던 우리 집 뽀야
뽀야. 부잣집에서 키워주지 못해 미안해. 귀티가 나서 넌 10살이 넘었을 때도 수컷인데 여자예요? 아기예요?라는 소리를 들었었지. 우리 집에 와서 행복했어 뽀야?
돈은 많이 없었지만 우리가 너를 많이 사랑해준 거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늘에서도 행복해 우리 엄마 바라기 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