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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거나 Mar 17. 2021

분노의 일기

늦게 잘 때 알아봤어. 궁뎅이가 무거울 때 알아봤어.

퇴근을 하고 오니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인사도 없고 어디 있나 찾아봤는데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왜 엄마한테 인사도 안 하냐니까 "몰라, 짜증 나!"하고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 체육 시간에 어쩌다가 키 순으로 섰는데 다들 고만고만 한데 자기가 제일 앞에 섰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장난 모드가 발동하여

 "그럴 줄 알았다. 늦게까지 안 자고 운동 안 하더니 잘한다 잘해"하고 딸아이를 놀렸다.

"엄마는 다 고만고만하다 했잖아. 왜 나를 맨 앞에 세우냐고. 다시 수정해준다고 하셨는데 안 해 주셨어!"하고 이불을 툭툭 쳤다.

왜 엄한 데서 화풀이를 하냐고 혼냈지만 실은 중간은 갈 줄 알았는데 맨 앞줄에 섰다는 것에 놀라기도 하고 키 순서대로 서는 것이 작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쫀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주 동안 우리 반 아이들은 급식을 키 순서대로 줄을 서서 먹었다.  딸아이의 행동을 보고 아뿔싸 싶었다. 우리 반 어떤 아이는 집에 가서 "엄마 또 내가 맨 앞이야." 이런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번호순으로 줄을 세울걸 그랬나? 아니면 모둠 순서대로 줄을 세울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4월에는 키가 큰 순서대로 거꾸로 먹인 다음에는 번호 순서대로 세워야겠다고 생각이 버뜩 든다.

나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고 지금도 169에 여자치고는 큰 편이다. 나는 항상 뒷줄에 서서 앞자리 아이가 부러웠는데 내 딸아이는 반대 상황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 되어 보지 않으면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상황, 남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은 40이 넘어도 참 어렵다.

분노의 일기
새옷입고 좋았었지. 체육 시간 전까지는 말이야.

친구들에게 우리 딸 체육 시간에 키 순서대로 서서 제일 앞에 서게 되었다고 톡을 보냈다. 커 보였는데 의외다 하는 반응과 너 닮으면 나중에 크겠지라는 반응이 왔다.  딸의 체육 선생님이 나의 절친의 지인이어서 @@언니 체육쌤 땜에 우리 딸 골났다고 하니 친구가 풋 웃으면서 딸의 골을 풀 묘책을 하나 마련해줬다. 고만고만한 애들 중에 제일 말 잘 듣고 똑스러운 애를 앞에 세운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옳다구나! 그 말을 듣고 딸에게 "야, 선생님들 보통 고만고만하면 제일 똑스러운 애를 앞에 세워. 제일 앞에 기준도 해야 되는데 말 안 듣고 뒷사람이랑 장난치는 사람 세우고 싶겠냐? 안 그래?" 하니 딸아이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제일 앞은 싫은데...."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했으면 훈훈한 모녀가 됐지만 나는 몹쓸 모성은 한발 더 나갔다.

"야 그러니까 일찍 자랬잖아. 운동도 하고, 아니면 서현 작가 커졌다 알지? 걔처럼 비 먹고 엄청 자라던가 안 그래?

"엄마 뭐라고 했어? 이 엄마가! 늦게 잘 거다. 키 포기다. 어쩔 건데? "

"그러니까 왜 그렇게 궁둥이가 무겁냐고 메롱메롱!"

똑스러워 제일 앞에 선 것이라고 잘 포장해줬지만 네가 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계속 들먹거린 시비 쟁이 엄마 때문에 우리 딸의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했다.


저 눈빛을 기억해야겠다. 체육 전담은 정말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애들을 키 순서대로 세우지 말자고 누군가로부터 따가운 눈총은 내 딸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출처:서현작가 커졌다(그림책 엄청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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