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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거나 May 10. 2021

모텔에서 태어난 아기와 명품을 사기 위한 긴 줄

 기본적으로 나는 한국 언론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 의해 공정하게 뉴스를 배분한다는 포털은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취재는 않고 페북과 카페의 돌아다니는 글로 따옴표, 받아쓰기만 남발하는 기사는 안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뉴스도 보지 않고 포털도 쇼핑을 할 때 외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M사 뉴스만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얼핏 보고 시사 유튜브와 시사 잡지만으로 나는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읽어간다.  
자전거를 타는데 M사 뉴스에서 긴 줄이 보인다. 무슨 줄인 지 궁금해서 뉴스를 지켜봤는데 샤넬 가방을 사기 위한 줄이었다. 꼬리가 엄청 긴 뱀이 똬리를 무장해제했는지 줄을 끝이 없어 보였다. 한국은 명품 소비국가 7위라고 했다.   그 기사의 뒷부분은 주택이나 주식은 장벽이 있는데 명품 재테크(특히 운동화 같은 것)는 장벽이 없어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것이었다.   내 친구도 2005년쯤 300을 줬던  샤넬 백이 천정부지로 솟아서 한참을 쓰고 되팔았다. 머리에서 사서 어깨까지 떨어진 나의 주식 재테크보다는 훨씬 쏠쏠하고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40이 넘어서도 아이에게 물려줄 명품백을 하나 마련하지 못한 내가 한심한 것일까? 명품이 뭐라고 줄을 저렇게까지 서야 되는 것인가? 하는 두 개의 질문이 오락가락하면서 자전거 타기를 마무리했다.  
샤워를 하고 곧 이어지는 시사 프로그램은 내가 얼마 전 받은 시사잡지의 내용을 다뤘다. 내가 받은 시사잡지의 주요 기사는 '모텔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뉴스를 잘 안 보기 때문에 이 사건이 얼마만큼 파장을 일으켰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 사건의 대부분의 보도가 정인이 사건처럼 아동 학대에 초점이 맞춰서 보도가 나간 듯했다. 내가 읽는 기사는 아동학대가 일어났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서사에 집중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태어난 지 2개월 된 아기가 의식을 잃어 부모가 아동학대로 처벌을 받았다. 비참한 결과가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처연했다. 돈이 없는 젊은 부부는 모텔을 전전하면서도 아이들을 열심히 키웠다는 모텔 주인들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딱한 사정을 안 모텔 주인이 방값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택배일을 했던 남편은 꼬박꼬박 돈을 내고 주말에는 평일보다 비싼 방값 3만 원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취사를 할 수 있는 부엌이 있는 집다운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그들을 도우려고 했던 모텔 사장님들, 그들의 행방을 찾아 도우려고 했던 행복복지센터 담당자 등 도움의 손길은 있었다. 공간은 없었지만 남편은 택배일을 하며 아내는 육아 수첩을 성실히 기록하며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적 장애가 있던 아내가 사기죄로 현장에서 체포되고 남편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첫째는 보육원으로 보내지고 모텔을 전전해가면서도 지키려고 했던 그들의 가정은 해체되고 만다.
  명품을 사려고 길게 늘어진 행렬을 볼 수 있는 곳도 대한민국이고, 모텔에서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을 볼 수 있는 곳도  대한민국이다. 천만 원이 넘는 조리원에서 케어 받는 신생아, 모텔에서 탯줄을 잘라야 했던 신생아. 이 간극은 줄어들 수 없을까? 왜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시사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했던 젊은 아빠가 떠올랐다. 내가 자랄 때 사랑받지 못했지만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의 새아빠가 되어준 젊은 아빠, 그들에게 능력도 없는데 가정을 가지려고 한다고 생채기를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읽는 시사 잡지는 가난의 형태가 점점 바삭바삭 말라간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6.25 전쟁을 겪던 아버지의 시대는 대부분이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흙처럼 끈끈한 연대가 존재했다. 40년이 지난 지금의 가난은 바삭바삭해져 각개전투 같은 모래알 같은 가난만 남았다고 말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예전에만 통용되는 표현이라는 것을 씁쓸하지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난의 원인에 대해 '노력해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가난한 경우가 많다'에 응답을 많이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설문 조사의 결과는 놀라웠다. 1990년대 설문은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지 않았지만(개인 탓 38%, 사회적 구조 탓 52%) 오늘날의 한국은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해서", "개인적 책임감이 모자라서", 가난해졌다는 인식이 매우 강해졌다고 나왔다.
  사회는 양극으로 치닫고 연대는 줄고 있다. 내 딸아이가 커서 살아갈 대한민국의 모습이 지금보다 더 바싹 말라갈지, 복지의 혜택이 늘어나 지금보다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지는 모르겠다. 계속 글작가가 되겠다는 딸아이의 꿈에 나는 초를 잘 친다. 전업작가가 되는 길은 매우 험난하기에 알바를 꼭 해야 된다고 틈날 때마다 언급을 해준다. 그런 딸이 내게 묻는다. "엄마 내가 노력해서 되고 싶은 작가가 되었는데 돈을 못 버는 것은 내 탓이 아니지 않나? 돈 못 버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글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닐 텐데 응 그치 엄마?"하고 말이다. 어떤 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모텔에서 태어난 아기도 잘못이 없고, 그 부부가 가난하게 된 탓도 온전히 그들 탓은 아닐 텐데, 부자가 잘해서 부자로 태어난 것이 아닐 텐데 무엇이 문제일까?
시사잡지, 뉴스 기사, 시사 프로그램을 본 그날은 쓴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10세가 조금 더 따뜻한 사회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명품도 바라지 않고 이만하면 소박한 소원인데 신이 들어주지는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은 나는 무신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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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시사인 7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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