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셋째를 낳고 애국자가 되다.
#4. 헤어지려고 떠난 아내가 찾아간 곳
"엄마, 안 돼. 가지 마! 억 억 억"
아내는 울면서 매달리던 첫째를 눈물 젖은 매정함으로 떼어놓고는 그렇게 떠나갔다. 아내가 떠난 후 첫째는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울고만 있었다. 수분이 말라 눈물이 나오지 않고 목소리가 쉬어 쇳소리가 날 때까지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큰 방에서는 뒤집힌 밥상으로 엉망이 된 바닥에서 둘째가 힘겹게 울음을 이어갔고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막내도 언니를 따라 덩달아 울고 있었다. 나도 울고 싶었지만 현재의 상황이 무섭고 경황이 없어서 울음을 뒤로 미뤄야 했다.
떠나갈 때 아내의 표정과 행동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싸늘하고 굳은 다짐을 보았기에 되돌리기 힘든 것을 체감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엄마를 잃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우선 달래야 했다. 빠른 시간 안에 안정감을 주지 못하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을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었다. 첫째를 안아서 큰방으로 데리고 왔고 아이 셋을 한꺼번에 얼싸안고 "괜찮아, 엄마는 곧 올 거야"를 반복했다.
울다 지친 아이들은 하나씩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 사이 엎질러진 그릇들, 그리고 밥과 반찬들이 뒤섞여 있는 바닥을 주섬주섬 주우며 치우기 시작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기 힘들지만 엎질러진 밥과 반찬들은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나의 실수도 엎질러진 물이 아니라 엎질러진 밥과 반찬이길 바랐다. 내 안에 감추고 있던 난폭함에 스스로도 놀랐고 통제하지 못한 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내 전화를 차단한 듯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내가 갈 만한 곳을 생각해 봤다. 집을 나갔으니 잠을 잘 수 있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먼저 짐작 가는 곳은 처녀 때 매일 붙어 다니던 두 친구가 떠올랐으나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에 그들을 찾아갈 가능성은 낮았다. 그 외엔 잠을 재워달라고 할 만큼 친한 친구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집간 딸이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와 친정으로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라 생각됐다. 그러나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 아내는 곧장 친정으로 향했다.
그것도 모른 채 처남이나 처제에게 전화하기를 후순위로 미루었다. 누나(언니)가 싸우고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고 하기엔 부끄럽기도 했고, 장인과 장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선뜻 선택하지 못했다. 혼자서 적당한 숙소를 정하고 지내는 게 아닌가라고 단순하게 추측했다. 전혀 예상밖에 아내는 본인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갔다. 그것은 나에게 매우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나의 난폭한 행동과 욕설을 가족들에게 알리고 그런 사람과는 살지 못하겠다고 말하기 위해 친정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처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 처남이었기에 처남의 전화는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였다. 처남의 전화로 아내가 친정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처남이 화해를 하라고 전화했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처남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과 달리 많이 격앙되어 있었다. "형님, 누나에게 왜 그러셨어요? 그러고도 형님이 남자예요?"
아직 대학생이던 혈기왕성한 처남은 펑펑 울며 무서워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잔뜩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처남의 어떤 말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밖에 할 수 없었다. 처남의 말이 끝나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것을 들어줄 만큼 처남에게 감정의 여유가 없었다. '친정으로 곧장 가서 오늘 있었던 끔찍한 일을 다 얘기했다는 것은 나와 정말 헤어지려고 그런 게 아닌가?' 아내의 심정과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처남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처남과 평생 하지 말아야 되는 내용의 통화가 끝나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아내가 집을 나간 게 그저 나를 겁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아내는 결혼 생활에 대한 진지한 결정을 하기 위해 집을 나간 것이다. 마침 자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깨서 엄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집안 어디를 둘러봐도 엄마는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이들의 걱정도 깊어갔다.
헤어짐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첫째 밖에 없었다. 둘째와 셋째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울 뿐이었지만 첫째는 엄마와 헤어짐을 감지하고 있었다. 첫째가 상처받지 않도록 계속 예의 주시 했다. 아이가 걱정스러운 얘기를 하면 안아주면서 "엄마는 아빠와 잠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고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꼭 돌아올 거야"라고 해주었다.
월요일 출근부터 고민이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을 보내놓고 출근을 하면 지각할 수밖에 없었고, 끝나고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면 조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부서장과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연차를 써야 했다. 아내가 그때까지는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3일 휴가를 냈다. 내가 엎질러 놓은 것은 내가 주워 담아야 하니깐 태세전환을 빠르게 해야 했다. 세 아이를 온전히 케어해 본 적이 없어 모든 게 서툴렀다. 누구한테 전화해서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한 명을 만족시키고 있으면 또 다른 녀석이 불만족스럽고 그것은 계속 반복되었다.
난 자리는 안다고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맞벌이를 하면서 육아는 더 힘들었을 텐데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지냈던 아내를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생겼다. 야근 아니면 회식으로 이어가던 내 삶을 불쌍히 여겼던 지난 생각들이 너무나도 이기적이었다. 아내의 배려와 희생을 조금이라도 생각했었더라면 지금처럼 살지 않았을 것이다. 육아와 살림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한 것들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문장을 가슴깊이 새길 수 있었다.
엄마를 대신하게 된 삼일은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살림과 육아로 힘든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삼일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한 게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매일 밤 소주로 지새웠다. 내일이면 3일째 휴가도 끝나는데 아내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장인, 장모님께는 아직까지 전화를 드릴 면목이 없었다. 아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을 힘들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빨리 전화해야만 했다.
3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아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또다시 이틀 더 휴가를 써야 한다. 회사가 개인의 사정을 봐줄 만큼 여유로웠던 것도 아니었기에 휴가를 허락받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녁 8시가 넘어도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부서장과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죄인처럼 휴가를 허락받았다. 아이들이 잠든 사이 용기를 내어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장모님, 정서방입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왜 그랬나?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닌데,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러나 배우자에게 폭언이나 난폭한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네. 나는 그렇다 치고 장인어른이 많이 실망하셨네. 00은 지금 동해바다로 간다고 하곤 강원도로 떠났어. 토요일이나 돼야 돌아온다고 하니 그때 집으로 오게. 와서 장인어른께 잘 말씀드리고 00 데리고 가게나.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로 통화하는 일 없게 해 주게"
"네 장모님 명심하겠습니다"
아내는 바다를 좋아했다. 특히 파도 소리가 시원한 동해 바다를 유난히 좋아했다. 아내 마음에 쌓인 앙금이 동해바다의 큰 파도에 휩쓸려 멀리 떠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동해 바다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