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셋째를 낳고 애국자가 되다.
#3. 돌이킬 수 없는 싸움 끝에 아내는 집을 나갔다.
아내는 담배를 누구보다 끔찍이 싫어했다. 어떤 연유로 담배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운전 중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가차 없이 짜증을 냈다. 특히 자신의 파트너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했다.
담배와 술을 인생의 낙으로 살던 시기의 나는 아내를 만난 이후 인생의 낙 중 하나를 버려야만 했다. 연인 사이나 부부간에 사랑을 전제로 금연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아내는 다행히 사랑을 걸고 금연을 강요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금연을 단호하게 하지 못하는 빌미가 됐을 수도 있었다.
담배의 독하고 역한 냄새가 아내를 괴롭히는 건 당연했고 멀리서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있거나, 입에 물고 빠는 행위는 아내를 자극시켰다. 모르는 사람이 담배를 펴도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에 사랑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결혼을 걸고 금연을 요구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부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연애기간 싸움의 대부분은 담배로 인한 것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끊었다고 말해놓곤 아내가 없는 곳에서 피우는 거짓 행동이 문제였다. 아무리 비누로 손을 빡빡 씻고 향수로 무장을 해도 아내의 담배 촉은 예리했다. 반복되는 거짓으로 아내의 신뢰를 잃어갔다. 매번 같은 일로 싸우는 게 싫어서 담배를 끊으려고도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도 담배는 부부싸움의 주원인이었다. 싸움의 이유도 연애때와 같았다. 매번 끊는다고 해놓고선 몰래 피다가 걸린 게 문제였다. 담배 문제로 반복되던 싸움은 첫째가 태어난 후에 종식되었다. 공증을 받진 않았지만 혈서에 가까운 각서까지 쓰고 금연 맹세를 했다. 더구나 아이를 위해 담배를 끊는 것은 아내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은 완전한 금연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치밀해진 흡연 첩보작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셋째가 태어날 때까지 한 번도 걸리지 않았으니 완벽에 가까웠다.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담배에는 예외가 없는 매정한 사람이었므로 그럴 일은 없었다. 문제는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으며 사람은 언제나 실수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결국 어느 주말 아침 언젠가 터질 문제가 터졌다. 지난 금요일 밤 회사 직원들과 술을 마셨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에 잔뜩 취해 귀가했다. 평소 같았으면 담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점검했겠지만 승진 누락의 쓴 고배를 마신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고 옷은 담배 냄새로 쩔어 있었다. 그 당시는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기여서 몸에 담배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소지한 담배와 라이터는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술기운이 그대로 남은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몸을 마구 흔들며 큰 소리로 깨우고 있었다. 해는 이미 거실 중앙까지 들어찼고 나를 뒤흔드는 아내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빨리 일어나 얘기 좀 해"
싸늘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주 들을 수 없는 중저음의 톤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경고의 신호였다. 몽롱한 정신이 한순간에 번쩍 들었지만 숙취로 인해 몸은 무거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우선 일어나야 했다.
"무슨 일이야. 좀 만 자고 일어나서 하면 안 되는 거야?"
"안돼! 빨리 일어나"
평소 아내와 달리 강압적인 반응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그제야 주머니에 든 담배와 라이터가 생각났다.
"주머니에 담배 뭐야? 담배 끊었다면서 아직도 피고 있었던 거야?"
"아... 그게..."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있어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피해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덜 깬 상태에 머리까지 무거워 대화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아내는 그런 나의 상황을 봐줄 만큼 여유와 자비가 없는 상태였다.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또 담배를 피워? 애 아빠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봐! 할 말 있으면 해 봐"
"........."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이 아빠로서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매일이 전쟁터인 직장 생활과 삶의 팍팍함을 견디기 위한 탈출구가 술과 담배뿐이었던 어리석은 가장이었다. 어쩌면 삶의 고통에서 술과 담배 덕분에 잘 견디며 살 수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이유가 됐든 아내를 속였고 가장 싫어하는 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었기에 상황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이제 오빠라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의지해야 할지 걱정이 된다. 애 셋 아빠라는 사람이 자기 쾌락을 위해 사람까지 속이면서 그러고 싶어? 애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인 아내의 언성이 10여 분간 지속됐다. 아이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이라지만 아내의 목소리는 새어나가 아이들이 다 듣고 있었다. 첫째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엄마에게 안겼다. 싸우지 말라는 표현이었다. 고개가 저절로 떨궈졌다.
첫째 덕분에 잠시 휴전을 맞을 수 있었다. 냉전이 소강상태일 때 씻고 정신을 조금 차려야 했다. 씻으면서 담배의 존재를 아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물건을 뒤지거나, 핸드폰을 뒤지는 일이 없는 아내여서 강제로 주머니를 뒤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젯밤 만취 상태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서 잠들었고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나 라이터가 흘러내렸던 것이다. 시간을 어제저녁으로 돌리고 싶었다.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더니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 밥을 먹이고 있었다. 밥상 한자리에 손대지 않은 밥그릇이 보였다. 내 밥인 양 자연스럽게 착석하고 조용히 밥을 먹으려고 했다. 내 밥까지 챙겨준 거라면 아내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한 숟갈 뜨려는데 아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다음 주 어머니 생신 준비 오빠가 알아서 해. 지금 기분으로는 어머니 생신상을 차릴 수가 없어"
"음... 그건 좀 다른 얘기 아닌가! 나한테 기분 나쁘다고 어머니한테까지 그럴 필요가 있어?"
"몰라 당신 어머니니깐 당신이 알아서 해"
"뭐? 당신 어머니?"
"당신 어머니지 내 어머니는 아니잖아. 이렇게 만든 건 믿음을 주지 못한 당신 때문이야. 그러니까 알아서 해"
아내는 아마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라는 의미에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내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나는 감정이 상했고 이내 불같은 화로 번졌다. 아내의 말을 잘 이해하고 사과해야 했으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철없이 어리석었던 나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스러운 일을 저질렀다.
감정의 끝을 드러내며 결국 냉전은 극에 치달았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참아도 부모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감정은 이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소홀하지 않았던 아내다. 이성으로 감정을 잘 추슬렀다면 아내가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이해했을 것이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면 어머니의 생신상을 절대 무시할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짐승 같은 나는 아이들이 다 보는 앞에서 먹던 상을 엎었고 모진 말과 욕설을 아내에게 퍼부었다. 눈이 제대로 뒤집혀 아이들이 있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울었고 아이들도 숟가락을 든 채 얼음이 되어 엉엉 울었다. 상황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았다. 귀가 멍해지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순간 몸이 굳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건지 스스로도 놀랐었다. 엎질러진 상과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겁을 먹고 있기에는 더 큰 위기가 닥치고 있었다.
아내는 갑자기 캐리어를 들고 자신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나이의 첫째가 두려움에 떨며 엄마를 말리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안돼. 가지 마"
최악의 상황으로 만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많이 늦었고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어떻게든 용서를 구해야 했다.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울며 빌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통곡하듯이 울며 따라다니며 빌었지만 아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짐승 같은 남편의 행동에 한시라도 이 집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컸는지 아내는 옷가지들을 쑤셔 넣듯 넣었다.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첫째는 엄마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아내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매몰차게 아이를 뿌리쳤다.
"엄마 이제 못 볼 거야. 그러니까 아빠하고 잘 살아"
문을 열고 나간 아내는 그날 밤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