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셋째를 낳고 애국자가 되다.
#1. 하나도 힘든데 셋은 어떻게 키워요?
양가 부모님의 경제적 우려는 셋째가 태어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셋째는 가족들의 축복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막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관심을 독차지했겠지만 사랑받을 만한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 효녀라고 불릴 만큼 어른들의 손이 덜 갔다. 잘 울지도 않고 밤낮도 바뀌지 않았으며 먹기도 잘 먹었다. 순해도 이렇게까지 순할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나기 전 자신의 위태로웠던 운명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갓난아기들은 뱃속짓이라고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실제 감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셋째의 뱃속짓은 환한 미소였나 보다. 누워있는 셋째를 바라보거나 안아주고 있으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어른들의 관심은 온통 셋째에게 쏠렸었다. 셋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쁨을 받으려고 뱃속에서 많은 노력을 한 것처럼 아이는 이쁜 짓만 골라서 했다.
셋째가 태어나면서 우리가 사는 지자체에서 출산 지원금으로 백만 원이 나왔다. 가계에 큰 도움이 될 만큼의 금액은 아니지만 셋째를 가진 부모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자녀는 아이 셋부터였다. 셋째가 태어나고 우리 집은 다자녀 가정이 되었다. 하나와 둘의 차이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둘과 셋은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했다. 육아의 측면으로도 차이가 있겠지만 뭔가 모를 숫자가 주는 많음이 있었다. 팔이 두 개라 아이 손을 잡아도 둘 밖에 잡을 수 없고, 안아주어도 둘 밖에 안아 줄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셋은 둘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출산 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했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애국자라며 박수와 응원을 보내줬다. 마치 자신은 할 수 없다는 것 마냥 대단한 사람 취급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아이 셋 아빠라는 게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모양이다.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나에 대해 다른 것들은 다 잊어도 아이가 셋이라는 것은 잊지 않았다. "하나도 힘든데 셋을 어떻게 키우냐? 대단하다"라며 칭찬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
사회적 지위보다 아이 셋 아빠 타이틀의 영향력이 더 컸다. 사회적 분위기가 셋을 낳으면 신기하고 대단하게 생각했다. 부모님 세대에 아이를 6명은 기본으로 낳았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나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셋이라니 감당하기 힘들 거라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이 셋을 낳는 동안 아내의 산후조리원은 처가댁이었다. 장모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산후조리원 비용을 아껴보려는 아내의 마음이 컸다. 물론 산후조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장모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성의를 표현하기는 했다. 그래도 산후조리원 보다 믿을 수 있고 저렴했다. 첫째 때는 아내가 육아 전문 서적을 열심히 공부한 덕에 장모님과 트러블이 많이 있었다. 둘째 때부터 아내는 조금씩 마음을 놓터니 셋째 때는 장모님보다 더 터프해졌다.
진짜 육아는 아이 셋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됐다. 도저히 장모님의 능숙한 손놀림을 따라갈 수 없었다. 둘째를 키우면서 노하우가 쌓이긴 했지만 한 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육아에 능동적이지 못하면 부부 중 한 명은 큰 데미지를 입는다. 아이가 셋이 되면서 아내의 명령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아내가 셋째 젖을 먹이는 사이 둘째가 소변이 마렵다고 하거나, 첫째가 장난감 놀이를 하자고 한 사이 둘째가 부엌에 들어가 사고를 친다. 이런 식으로 꼭 한 명의 사각지대가 생겼다.
모든 일이 그렇듯 요령이 생기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나는 셋을 케어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둘 키우는 거랑 크게 다를 게 없는데?"라고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신기하게도 셋째는 거저 키우는 것 같았다. 셋째가 워낙 순하기도 했지만 육아의 부담이 가중된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다. 어쩌면 '셋'이라는 숫자에 괜한 겁을 먹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 세대만 해도 육아는 순전히 엄마만의 몫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용기 있는 가장이 있다면 내일 당장 헤어져도 할 말이 없는 시대이다.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원시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유전자는 질겨서 아직까지 남자들은 아이를 케어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육아에 적극적으로 임하려는 마음이 부족하다. 육아 대신 살림을 챙기는 게 편해서 그렇게 업무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남성들의 질긴 유전자와 달리 여성들의 유전자는 완전히 바뀌었다. 엄마가 육아 주 담당자인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아빠가 돈 벌어오고 엄마는 애 키우는 그런 시대는 이미 떠났다. 엄마도 아빠처럼 똑같이 돈 벌어오는 상황에 육아는 왜 엄마 몫이 되어야 하겠는가. 육아가 바탕이 되지 않은 남편을 곱게 바라볼 수 없다. 육아에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최소한 5할의 몫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아빠에게 원시시대 유전자가 강하게 박혀있는 집은 아이를 하나만 낳는 게 좋다. 아이를 낳을수록 부부 관계만 멀어지고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빠가 육아에 뒷짐 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개선되기 힘들다. 뭐든 잘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지는 게 첫 번째다. 육아 속으로 깊게 들어가야 한다. 주 양육자 부 양육자 개념으로 주 양육자가 시키는 것만 해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동 양육자로서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아이 셋을 원만하게 키워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이 셋을 키우는 게 크게 힘들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결혼 전부터 아이들을 끔찍이 좋아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카들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첫 조카가 태어났을 때가 한 여름이었는데 모기장 옆에서 혹시나 모기가 들어갔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밤을 지새웠던 적도 있었다. 아기를 안고 있는 따뜻한 느낌과 천사 같은 표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기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되면서 결혼은 필수가 됐고 아이를 많이 낳는 건 취향이 되었다. 아내 역시 아이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참 잘 맞았다. 신혼여행에서 당차게 다섯 명을 계획했으니 부창부수가 따로 없었다.
내가 아기띠로 셋째를 안고 아내가 첫째와 둘째 손을 잡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봤다. 때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이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는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애국자'였다. 원래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로 살아왔지만 다른 사람에게 애국자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아이 셋을 낳았을 뿐인데 누구나 알아봐 주는 애국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