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겨 엉망이 된 집상태를 보면서 분노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우리 집을 풍비박산 낸 원인 제공자를 빨리 찾아 응징하고 싶었다. 관리사무소에다 우리가 집에 도착한 것을 알렸더니 직원 두 분이 오셨다.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다짜고짜 어디서 물이 샜냐고 물었다. 직원분은 약간 당황하시면서 윗집인지 어디인지는 아직 확인이 필요한데 윗집은 설 명절이라 고향에 갔고 내일 돌아오신다고 했다. 그리고 오전에 같은 라인 13층에서 동파된 수도관이 터져 계량기가 하염없이 돌아간다는 민원이 접수된 게 있었고 그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고 했다. 덧붙여 누수 원인을 파악하려면 누수 전문 업체를 통해 진단받아봐야 된다고 했다.
나는 직원분의 얘기를 듣고 혼란에 빠졌다. 대개 누수의 원인은 바로 윗집인데 3개 층이나 위에 있는 13층 집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니 관련 지식과 경험이 없던 나로선 혼란스러웠다. 그러고는 관리소 직원분들은 우리 집에 차있는 물을 퍼내기 위해 쓰레받기와 양동이를 들고 오셨다. 직원분 중 한 분이 " 혹시 모르니 물에 잠긴 현장 사진 좀 찍어두세요. 그다음 우리가 물 퍼내는 거 도와드릴게요. 다시 복구하고 사셔야죠? "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직원분들은 고난에 빠진 우리를 자진해서 도우러 온 것이었다. 관리소 직원이 꼭 해야 할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발 벗고 도와주신 것이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나와 만삭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관리소 직원 두 분은 갖가지 도구로 집안 곳곳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고 어느덧 고였던 물들이 사라지고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러난 마루 바닥과 나무로 된 가구들은 물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마루는 교체가 필요했고 가구들의 다리는 축축하게 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집에 차 있던 물을 다 퍼내고 나니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에서 히터로 버티고 있을 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에게 곧장 갔다. 아가들은 다행히 의자에 누워 곤히 잠들었고 아버지는 마음을 졸이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일단 인근의 모텔로 이동하여 부모님과 아가들을 쉬게 해야 했다.
모텔 침대에 누운 나는 고통스러운 긴 하루를 돌아보며, 앞으로 있을 일들까지 생각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부모님은 기차로 댁에 보내드렸고 아이들과 아내는 처가에 데려다주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다 위 바위섬과 같은 침대 위에서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누수 탐지, 마루 시공, 가구 정비, 피해 보상...'
설 연휴기간이라 마루시공 업체는 연락이 닿지 않았으나 다행히 누수 탐지 업체는 연락이 닿았다. 누수 전문가는 우리 집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싱크대 하부장을 열고 누수 탐지 기계를 바닥에 갖다 대고는 누수의 원인을 찾는 듯 보였다. 그분 얘기로는 최근 계속되는 강추위로 우리 아파트에서 누수 사고가 몇몇 있었다고 한다. 강추위로 얼었던 수도관이 터져서 생긴 누수라고 했다. 준공된 지 14년 된 아파트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수도관이 다용도실 쪽 베란다에 있어 외부와 맞닿은 위치라 강추위에 얼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누수 전문가는 바로 윗집을 올라갔다 오더니 누수의 흔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누수 전문가에게 13층에서 수도관 동파가 된 것을 얘기해 주었다. 감정에 휩싸여 있던 터라 윗집에서 샌 게 아니면 분명 13층에서 샜을 거라고 확신했다. 누수 전문가를 따라 13층에 같이 올라갔다. 문을 열어준 13층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10층에 물이 샌 것을 왜 13층에서 확인하냐?"라고 비아냥 거렸다.
누수 전문가는 이곳저곳 탐지 기계를 들고 돌아다니며 진단을 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내려갔다. 우리 집으로 돌아온 전문가는 가능성은 있지만 13층의 바닥을 뜯어보지 않고는 100% 확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바닥을 뜯는 일은 13층의 동의가 필요하고 비용은 내가 부담해야 한다.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비용을 떠나 아까 전 13층 주인의 태도로 보아서는 누수 탐지를 위해 바닥을 뜯는 동의를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누수 업체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배에서는 꼬르륵 알람 소리가 들렸다. '그래. 뭐 좀 먹고 힘내서 다시 생각해 보자'라며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맥주 몇 캔을 사들고 왔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으려고 하는데 싱크대 하부가 눈에 들어왔고 물에 불어서 형태가 일그러져 있었다. 더불어 가구들까지 둘러보는데 물에 닿았던 아랫부분들은 물에 불어서 형태가 틀어지고 물 얼룩이 생겨 있었다.
'하...'
집을 말리기 위해 보일러 온도를 높였더니 물에 젖었던 가구들이 마르면서 변형이 된 것 같았다. 망가진 가구들은 눈을 질끈 감고 쓴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축축이 젖어있는 마루 바닥은 썩기 때문에 바꿔야 했다. 신기하게도 물이 천장에서 샌 게 아닌지 벽지는 멀쩡했고 아래에 걸레받이 쪽 벽지만 얼룩이 살짝 보였다. 물이 천장에서 안 새고 도대체 어디로 샌 건가?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누수 전문가는 다용도실 베란다 쪽 수도관이 묻혀있는 벽으로 흘러들어왔다고 하는데 13층의 벽과 바닥을 뜯어보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설 연휴 마지막 날에 마루 시공 업체와 연락이 되었다. 고맙게도 휴무인데도 불구하고 침수되었다는 말에 방문해 주셨다. 상태를 둘러보시고는 방에는 장판이니 가구 밑에 물기 제거 잘하고 잘 말려서 사용하라고 하셨고, 거실과 부엌은 마루로 되어 있어서 뜯어낸 후 시멘트 바닥을 완전히 말리고 마루 시공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시멘트 바닥을 제대로 말리고 시공해야지 안 그러면 습기가 올라와서 마루가 썩는다고 했다. 다음날 물에 젖은 마루를 뜯기로 하고 거실과 부엌의 가구와 짐들을 방으로 옮겨놓으라고 하시고는 가셨다.
혼자 가구들을 옮기기 버거워 처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흔쾌히 응해줬다. 축축한 집에서 독수공방 하는 매형을 위해 두 손 무겁게 맛있는 음식까지 한가득 들고 왔다. 힘센 처남 덕에 가구들을 방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고 며칠간 심신이 지친 나를 잠시나마 즐겁게 해 주었다. 둘이 좁다란 침대 위에 신문을 펴놓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주거니 받거니 술 한잔을 걸쳤다. 요 며칠 힘들었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설 연휴 마지막 날로 다음날 출근을 위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처남은 집을 나섰다.
다음날 아침에 기상하는데 축축하고 습한 집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긴 명절 연휴에 이어 휴가를 내겠다고 하는 게 쉽지 않아 일단 출근을 했다. 출근 후 급한 업무와 회의를 처리하고 부서장에게 우리 집에 벌어진 상황을 말씀드렸다. 다행히 이해해 주시고 휴가를 재가해 주셨다. 마루 업체와 약속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했다. 젖은 마루를 뜯어내고 나니 시멘트 바닥에는 아직 물이 고여 있었다. 시멘트 바닥이 잘 마르도록 보일러를 계속 켜두고 중간중간 환기를 자주 시켜주라고 하면서 5일 정도 말린 후 마루를 시공한다고 했다. 5일 후에도 바닥이 젖어 있으면 시공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5일간 바닥을 잘 말려야 마루 시공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환기를 시켰고 젖은 바닥을 둘러보면서 빨리 마르라고 기도를 했다. 침수로 인해 식구들과 떨어져 지냈고, 축축하고 습한 집에서 혼자 생활해야 했으며, 엉망이 된 집을 보면서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컸다. 이사 온 지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입주할 때 인테리어도 하고 가구도 새로 장만한 터라 새집과 새가구나 다름없었는데 물에 잠긴 흔적들인 일그러짐과 얼룩으로 폐가와 폐가구가 되어 버렸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13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아주머니가 나오셔서는 자기는 잘 모르니깐 저녁에 애아빠 오면 얘기하라고 했다. 그래서 저녁에 다시 찾아갔다. 문을 열고 아저씨가 나오더니 버럭 화부터 낸다.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냐. 왜 상관없는 층에 와서 물이 샜다고 하냐고"
아무런 준비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가기도 했고 그쪽에서 다짜고짜 화를 내니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으로 내려왔더니 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소주 한 병을 꺼내 글라스잔에 부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는 내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법적 대응을 하자고 했다. 나 또한 그 방법을 생각했고 알아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민사 소송은 판결이 어떻게 될지 불확실하기도 하고 끝없이 피곤한 여정이라 가능하면 대화를 통해 해결해 보려고 했다.
아내에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침수로 인한 금전적 피해보다 정신적 피해가 너무 컸던지라 소송까지 하면서 정신을 더 괴롭히기 싫었다. 내 돈을 들이더라도 마음의 휴식과 안정을 주고 싶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아내한테 다시 전화가 왔다. 아까 아내의 통화내용을 옆에서 들으신 장인어른께서 수리비를 줄 테니 이웃하고 얼굴 붉히지 말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경제적 피해 보상과 정신적 안정,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취할 수 있는가? 이웃과 소송을 하고 얼굴을 붉히며 싸운 뒤에 우리는 여기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까?' 한참을 고심한 끝에 정신적 안정을 선택했다. 더 이상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 장인어른의 오랜 연륜과 경험에서 나온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사건이 조용하게 마무리된 후 우리 식구들은 예전의 행복을 되찾았다. 그러나 13층 주인은 죄인이 된 듯 보였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눈을 보고 먼저 인사를 했으나,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