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5. 가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

다섯, 셋째를 낳고 애국자가 되다.

by 플래너앤라이터 Feb 25. 2025


#5. 가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기회



어젯밤 한숨도 못 자고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마음이 급했다. 아이들을 깨워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예민한 성격이라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은 잠을 많이 설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가. 일어날 일들을 미리 시각화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잠을 못 자서 몸이 무겁고 피곤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재회라는 것이 이토록 설렐 줄 몰랐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한 번의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억울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둘 사이에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좋아지게 하기 위해 집안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아이들 외출 준비도 끝났고 집 상태도 완벽했다. 차갑게 식은 집안의 온도가 다시 올라갈 것을 기대하며 들뜬 마음을 안고 처갓집으로 출발했다.


오는 동안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을 천천히 깨우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막상 처갓집에 도착하니 긴장됐고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다. 긴장감도 잠시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질 만큼 아이들의 옷차림이나 머리 상태가 처량했다. 안타까운 모습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엄마 없는 아이들 같았다. 가장 낡은 옷을 골라 입혔던 건지 옷에 뭐가 잔뜩 묻은 흔적이 많이 보인 옷들과 여자 아이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었다.


막내는 아기띠로 가슴에 안고 첫째와 둘째는 양손에 손을 잡고 처갓집 대문으로 향했다. 드디어 처갓집 문 앞에 섰다. 심장이 쿵쾅대고 얼굴은 달아올랐다.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렀다. 한참 동안 반응이 없이 조용했다. 안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아무런 말도 없이 삑 하고 문이 열였다.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고 현관문까지 연결되어 있는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 앞에 서자 처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조용하고 어색한 말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고요했고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내가 있을 만한 방은 굳게 닫혀 있어서 내부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런 상황이 불편했는지 처제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잔뜩 긴장한 채 안방으로 먼저 향했다.


장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장인어른이 침대에 걸터앉아 계셨다. 장인어른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관대할 수는 없었다. 내가 장인어른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장인어른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여자가 아무리 무례하게 굴더라도 절대로 욕을 하거나 폭력을 써서는 안 되네. 두 번 다시 하면 안 되는 거네. 자네도 자식을 키워서 알지 않나. 딸이 그렇게 울면서 집에 들어오면 얼마나 속상한지 알 거 아닌가. 처음에는 속상한 나머지 자네와 헤어져도 괜찮다는 생각까지 들었네.

그런데 애가 셋이나 있고 평소 자네의 행실과 마음 씀씀이를 알아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네. 한 번의 실수로 끝나기를 바라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고 아이들과 잘 살게.

00은 자네 보기가 어색하고 민망했던 모양인지 장모를 따라 시장을 갔다네"


장인어른이 말씀하시는 동안 소리 없이 펑펑 울고 있었다.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슬픈 일이었다. 지난 한 주 동안 온갖 상상을 하며 괴로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으며 터진 감사의 눈물이기도 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게나"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눈물을 추스르고 저린 다리를 끌며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굳게 닫힌 방문이 열리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처남이 나왔다. "욱해서 형님한테 함부로 말씀드린 거 죄송합니다. 누나가 울면서 집에 오니까 갑자기 분을 이기지 못했던 거 같아요. 이제는 그런 일 없도록 해요"


"그래, 처남 미안하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가장 중요한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만 남았다. 시장을 갔다던 장모님과 아내는 생각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들어오며 아내는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에게로 뛰어갔다. 처제방에서 한참 동안 아내의 웃음 섞인 울음소리와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내는 아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또한 아이들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 것이며. 이런 사태를 만든 나는 계속 가시 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처제 방문이 열리더니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갔다. 아내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싸늘했다. '장인어른과 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궁금해서 안방으로 가는 것이면 좋겠다'


아내에게 용서를 구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다가가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안방에 들어갔던 아내가 나오더니 아이들 외투를 입히고 짐을 챙겼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용서를 구하지 못한 채 아이들 옷 입히는 것을 도왔다.


처갓집을 나와 집을 가는 동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밤을 지새우며 준비했던 용서의 방법들이 장소며 타이밍이며 모든 게 어긋났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여느 때와 같이 잠들어 있었다. 아내는 그때까지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계속 눈치를 줬다. 아이들을 깨우지 말고 안고 가자는 의사를 비췄다. 아이를 한 명씩 안고 집으로 옮겨 계속 재웠다. 거실에 덩그러니 둘 만 앉게 되었다.


드디어 아내와 마주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많이 여위어 있었다. 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고민이 컸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미안해. 일주일 동안 많이 생각하고 후회하고 반성했어. 절대 하지 말아야 되는 욕설과 난폭한 행동다는 게 너무나 후회스러웠고 많이 고통스러웠어. 어떤 말로도 용서하기 힘든 언행이었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이야. 진심으로 미안해. 두 번 다시 조금의 폭력도 욕설도 하지 않을게. 한 번만 용서해 주고 우리 다시 잘 살자"


아침부터 눈물을 왕창 쏟아냈던 터라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눈물이 터졌다. 아내는 사과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흐른 후 아내는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상처가 너무 커서 쉽게 용서가 안돼. 지금 당장 오빠를 용서한다는 말을 못 하겠어. 시간이 필요해..."


아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미해결 상태로 지내는 것은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의 말대로 시간이 필요했다. 때로는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 주기도 하기에 우리는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이 일어났고 화목한 가정의 일반적인 모습처럼 돌아왔다. 다만 보이지 않는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정을 지키기란 원래 힘든 것이다. 사랑과 믿음, 배려와 희생으로 대할 때 가정은 유지된다.


우리의 '다섯'은 계속 유지될 것인가?

이전 27화 #4. 헤어지려고 떠난 아내가 찾아간 곳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