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 인터내셔널 스토리텔링 디렉터 정김경숙 님
지치지 않고 오래 가는 30년 직장 생활, 비결이 뭘까?
구글 본사에서 인터내셔널 프레스 총괄을 맡고 있는
로이스(정김경숙) 님의 다정한 편지가 벌써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50대까지 영어 공부, 자기 개발을 계속 하며
미국 본사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로이스 님의 넘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오늘 마지막 편지에서 '현타' 없이, 번아웃 없이 직장 생활하는 비결을 확인하세요.
※ 이 편지는 <번아웃 없는 30년 직장 생활의 원동력은?> 2편에서 이어집니다.
한 주 안녕하셨어요?
캘리포니아는 사계절 구분이 한국만큼 크게 뚜렷하지 않아요. 하지만 요즘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더워지고 있어요. 아침마다 조깅을 1시간 하고 들어오면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뭔가 열심히 했다는 표시인 것 같아, 동기 부여가 팍팍 되네요. 재택근무 8주째, 조깅으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많이 정상화 되고 있지요? 그래도 계속해서 모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래요.
오늘은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요. 처음에는 주 1편씩 총 5편을 쓰고 나면 재택근무가 끝날까 했는데, 아직 계속이네요. (ㅠ.ㅠ)
5편 주제는 제가 직장인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의 1인으로서 어떻게 가치를 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던 점을 정리해보려고 해요. 한 마디로 ‘착한 직장인’이라고 할까요?
자칫 자기 자랑이나 잘난척이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데요. 그래도 제가 직장생활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지만 용기 내어 봅니다.
제가 명함을 건네면, 상대방은 꼭 두 가지 코멘트를 합니다.
“성이 두 개네요?”
“점자 명함이네요?”
20여년 전부터 내 안에 함께 있는 양부모성을 쓰고 있고(물론 호적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명함에는 점자를 찍었습니다. 내 명함을 받는 상대방이 한 번 더 ‘성평등’이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이것도 나름의 문화 의식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보통 한 달에 명함 1통(100장) 정도를 썼는데, 사실 그 중 점자가 필요한 사람에게 제 명함을 건넬 기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점자 명함을 건네면, 상대방은 한 번 더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 명함을 신청하고 나서 다시 개인적으로 점자인쇄처에 보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구글코리아 전체가 점자 명함 신청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장 초년생일 때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이런 대화를 종종 하곤 했어요.
“로이스는 직장 생활 언제까지 할 거예요?”
“저는 40살까지만 하고 NGO(비영리 기관)에서 자원봉사로 일하고 싶어요.”
아뿔싸! 마흔살이 이렇게 금방 오다니! 마흔살을 구글에서 맞이하면서 직장 은퇴는 50살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50살도 금방 올 테니 밖으로는 얘기 안 하기로 했어요.
아마도 마흔살이 넘어서 본격적으로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은 결국 ‘왜 사는가?’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거창한 생각으로 시작한 건 아니고요. 20년, 30년 직장생활을 한다고 했을 때 내 직장생활의 동력은 무엇인지, 내가 지치지 않고 열정 가득하게 살 수 있는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답은 직장생활에서도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회의를 느끼고 퇴사를 생각하는 이유가 ‘일에 대한 성과를 더 올려봤자, 스스로 느끼는 가치가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라고 합니다. ‘뼈를 갈아넣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하루하루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답할 수 있어야 정말 ‘장기적으로’ 행복한 직장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저는 구글에서 일하면서 직장인으로서 궁극적인 목표와 인간으로서 사는 목표를 직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착한(좋은) 일하려면 직장을 그만두고 해야지, 라는 생각이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좋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구글에서 13년을 일하면서 오히려 조직 일원으로서 더 큰 임팩트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글이 갖고 있는 철학 중에 가장 많이 듣는 것이 “Right things to do(그게 바로 옳은 일이야)” 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하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야. 옳은 일이야.”라고 이런저런 회의 석상에서 누구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래, 그러면 이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해보자. 내가 그냥 자연인 로이스로 무엇을 하는 것보다, 구글의 정김경숙이라는 사람이 하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요. 특히 저희 관심 분야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성소수자(LGBTQ) 인권 지원.
평소 개인적으로 차별 없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성별, 나이, 국적, 언어, 종교, 성적 지향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본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보자는 생각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우리 사회에 정말정말 중요한 것인데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 하지 않는 것,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이 더 갔습니다. 사실 지금은 우리의 인권 감수성이나 실천성, 그리고 사회적 아젠다가 형성이 되고 있어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전보다 훨씬 공론화가 되었고 지지 활동도 많아졌습니다. (물론 가야할 길이 멀긴 합니다!)
2012년 경,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 센터 띵동을 설립한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어로 한국 첫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 센터로서 모금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우리나라에 아직 청소년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센터 하나가 없구나. 그리고 국내에서 성소수자 관련해서는 모금활동을 하기가 너무 어렵구나. 그래서 영어 사이트를 만들어서 이렇게 글로벌 모금 운동을 하는구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시 사이트에서 업데이트 한 모금 상황을 보니, 가장 많은 돈을 지원한 단체가 어떤 글로벌 단체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국내에서 이런 단체의 설립을 지원하는 게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당시 제가 속했던 구글 아태지역팀에서는 ‘Kpop 스타’처럼 좋은 사회적 활동 아이디어가 있으면 심사위원들 앞에서 공개 프리젠테이션 오디션을 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특별 펀드를 따오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사실 회사 지원 프로그램으로 국내 성소수자 센터 설립 기금을 내자는 아이디어를 내기까지는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1) 이게 회사랑 무슨 상관인가? 회사 돈을 쓰는 게 맞나?
(2) 이게 내가 하는 회사 일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아이디어로 오디션에 성공해서 지원하는 것과 내 업무 성과랑 무슨 관계인가?
(3) 혹시라도 사회에 성소수자 인권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회사에 누가 되면 어떡하나? 난 회사 이미지를 총괄하고 있는 사람인데, 회사에 누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사실 (3)번 우려가 너무 커서, 이 아이디어를 프레젠테이션 오디션에 갖고 갈 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나, 우리 회사가 안 하면 누가 하나, 라는 생각에 용기 내어 오디션 발표를 했고,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져서 띵동 설립 기금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가장 큰 힘이 된 말이 있었습니다. ‘구글이 이 곳을 지원하게 되면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람들로부터 구글코리아가 해코지를 입을 수도 있다. 정말 괜찮냐?’ 라고 물었을 때, 당시 오디션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아태지역 커뮤니케이션 VP가 저를 오히려 북돋워 주더라고요.
“로이스, 나는 이 일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건 right things to do(옳은 일)야. 걱정하지 마. 나는 네가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그 이후 띵동은 예정대로 잘 설립되었고, 2년 후에도 발표 오디션을 통해 추가 지원금을 받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외에도 인권재단 ‘사람’과 함께 국내 성소수자 인권 활동 지원 프로젝트인 ‘무지개온 프로젝트’를 시작해, 여러 전국 단위 성수소자 인권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 친화적인 직장을 만들기 위한 ‘다양성 가이드라인’ 프로젝트는 두고두고 기억납니다. 가이드라인을 다운받을 수 있는 웹사이트가 한 때 다운되었다고 담당자분이 말씀해 주셨을 때 참 뿌듯했습니다.
둘째, 우리 아이들.
당시 청소년 아이를 둔 엄마로서 ‘우리 애들이 어떻게 하면 시험이나 진학에 찌들지 않고 진짜 소중한 나를 발견하고 열정을 발견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애도 마찬가지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하라고 으쌰으쌰 해주는 사람이 청소년의 주위에 별로 없습니다. 공부 못하면 타박 받고, 심지어 성적순으로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들 속에 상처 받기 쉽습니다.
저도 제 아이에게는 조근조근 얘기하다가도 바로 윽박이 나오는 아주 평범한 한국인 엄마로서, ‘내 자식에게 말하기가 어렵다면 남의 애들에게는 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약 7~8년 전쯤 구글 안에서 같은 뜻을 가진 동료들과 함께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등학생 스무명 정도를 구글 오피스로 초대해 우리가 살아온 얘기를 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의사, 변호사, 검사 같은 직업명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글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있는지 생생한 직업 얘기를 들려주자는 아주 소박한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엔 대여섯 명의 자원 구글러들로 시작했고, 저보다 열정 넘치는 엔지니어 동료가 모임을 이끌면서 지금은 수십명이 돌아가면서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서 벗어나 지역 학교로 원정을 가는 ‘스쿨 어택’도 해오고 있습니다. 두 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이지만 형, 오빠, 언니, 누나 혹은 이웃 아줌마, 아저씨로서 얘기하는 시간은 저희에게나 아이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아이들이 보낸 수줍은 이메일을 받는건 참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셋째. 가슴 따뜻한 착한 기술.
기술회사에 다니는 만큼, 기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알려보자, 특히 착한 기술을 만드는 착한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나눠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구글이 개발한 기술 중에 라이브 트랜스크라이브(Live Transcribe)라는 실시간 자막 기술이 있습니다. 말을 바로바로 글로 바꾸기 때문에 청각 장애인들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사실 저는 이 기술을 최근까지만 해도 구글이 개발한 여러가지 착하고 좋은 기술 중 하나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 올해 1월에 드미트리라는 구글 동료를 만나게 되었는데, 청각장애인인 드미트리는 일반 사람과 다른 독특한 발음을 갖고 있어 일상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드미트리는 동료 연구자의 도움으로 본인의 독특한 발음을 실시간 자막 기술에 학습하게 해서, 난생 처음으로 손녀랑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아, 기술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것. 인간을 연결해 주는 것. 그렇다면 나는 이런 기술이나 기능들을 잘 알려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착한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스토리를 많이 알려서 더 좋은 기술이 나올 수 있도록 연구자들을 독려해주자.
2년 전, 수천 명이 참가하는 클라우드 컨퍼런스 행사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컨퍼런스 특별 순서로 “주제가 있는 런치" 꼭지를 만들어 ‘착한 기술’ 개발 사례를 소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음성으로 파킨슨병을 진단하는 아이디어를 낸 학생, 3D프린터로 인공 의수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애쓰는 엔지니어 등을 초대해서 가슴 따뜻해지는 기술 얘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최근에는 AI(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서 자연 환경을 보호하거나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는 착한 기술 얘기를 더 많이 나누려고 합니다.
※ <번아웃 없는 30년 직장 생활의 원동력은?>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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