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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 백조 Apr 13. 2022

해방감

나는 활화산처럼 들끓는 가슴을 가졌다. 터트리지 못하면 육신과 영혼이 시들어진다. 코로나19 매일 다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시들어지다 못해  늘어져 지내고 있다. 일탈을 상상하며 콩닥거리는 느낌을 불어넣어 소생시켜보려고 하지만 소용없다. 실체 없는 자극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불을 지필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남편이 큰아들만 데리고 주말에 스키장을 다녀오고 싶다고 한다. 안 그래도 무료하게 지내는 매일인데 주말에도 작은 아이와 단둘이 집에서 뒹굴 생각을 하니 답답해진다.


“나랑 딸도 데리고 가.”
 

지금까지 스키장을 가 본 것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생초보인 내가 스키장을 가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하다니. 남편이 적잖게 놀랜 듯하다. 그래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 가자. 너도, 딸도 이번 기회에 잘 배워보자!”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맞어. 가서 타야 하는 거지'.

가서 지켜볼 생각만 했다가 배워보자는 말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후회가 순식간에 밀려온다. 그래도 집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했기에 설렘으로 두려움을 조금씩 밀어내본다.


스키장에 도착하여 옷과 스키 장비를 두르고 나니 시작부터 기력이 달린다. 장비의 무게를 견디며 걷는 것이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엉기적대며 스키장 입구까지 겨우겨우 몸을 이끈다. 짜증이 올라오려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설원에 압도당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20 만에 찾은 스키장이 시들어진 나의 영혼에 생명수가  것이다.


남편이 나와 딸아이에게 스키 타는 법을 가르쳐 준다.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몸은 기억하고 있었는지 곧잘 따라 한다. 처음 스키 타보는 딸이 본인보다 빠르게 학습하는 엄마를 부러워한다. 기분이 좋아졌지만, 어깨를 들썩이며 티를 내는 것은 어른의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에 겸손을 떨어본다. 그러면서 딸에게 할 수 있다며 어른의 격려를 날린다.
 

“엄마도 처음부터 잘 탔던 것은 아니야. 너도 할 수 있어. 그렇지. 다리에 더 힘주고, 좀 더  A자로 벌리고. 땅 보지 말고, 앞을 봐야지. 헛 둘 헛 둘. 잘하네 잘하네”
 
고작 초보 코스 50m 내려온 주제에, 상급 코스를 자유자재로 활강하는 프로같이 말한다. 옆에서 남편이 함구한 채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딸아이를 가르친다.




어느 정도 연습을 하니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제대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딸아이를 밀착 코치하기로 하고 나는 아들과 함께 활강에 도전하기로 한다. 급경사로 시작되는  걸음부터 속도가 빨라지니 무서움의 레벨도 높아진다. 방향 조절이   되어 남과 부딪힐까 , 경사진 곳에서 굴러 우스운  보일까 , 그러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찢기거나 크게 다칠까  안간 힘을 다해 속도를 저지하며 천천히 내려오느라 다리가 떨어져 나갈  같다. 딸아이에게 큰소리치며 가르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아들은 기다리다 못해 스피드를 내며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혼자 남겨지니 괜히 왔나 싶어 울컥해진다.


하지만   완주를 거듭하다 보니 용기가 붙고 스피드가 붙는다. 한창 재미가 붙으려고 하는데 폐장할 시간이 다가오는지 주위가 한적해진다. 슬슬 마무리 지어야하나 고민하는 순간, 갑자기 한층  밝은 야간 램프가  터진다.  덕에 하얀 눈의 작은 입자들이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경관에 마음이 설레인다. 게다가 사람도 거의 없지 않은가.  나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 같았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정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바람도 무섭게 차쳐 살갗이 쓸려나갈 것 같다. 그래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홀로 누리는 이 고요함과 평온함을 놓칠 수가 없다. 망설임 없이 몸을 밀어 하강한다. 이번에는 다리에 힘을 풀고 바람에 기대며 속도를 낸다. 날카로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듯하다. 그 기분이 오묘해 두 팔을 서서히 벌리며 모든 힘을 풀어본다. 바람에 온전히 나를 맡기게 된 것이다.    


짧은 몇 분 안에 몸이 공기처럼 가벼워지면서 해방감이 느껴진다. 묶여있던 사슬이 풀리고, 오래 묵혀둔 갑갑함이 터져 나가는 듯하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시원함이다. 내려오고 나서 그 기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잠시 가만히 서있는다. 그때 알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활활 타오르게 할 뜨거운 무언가가 아닌 묵혀있던 갈증의 사슬을 차갑게 해줄 청량한 시원함이었다는 것을. 슬며시 끝이 보이지 않게 높이 솟아있는 상급 코스를 쳐다보며 남편에게 말한다.


 “남편! 나, 상급 한번 도전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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