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느슨한 연대’라는 단어가 자주 귀에 꽂혔다.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무리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데, 서로 귀찮게 하지는 않지만 연결되어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만나 본 적 없어도 생각이 맞닿아 연결될 수 있다니. 갈수록 외로워지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소외되지 않았다는 심리적 소속감, 안전감 같은 것을 선사하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연대를 느낀 적이 미미하다.
지금껏 살면서 ‘연대’ 또는 ‘연대 의식’을 실감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도 없었을 뿐 아니라(특권층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이고 싶다.) 연대가 필요한 이유도 딱히 없었다. X세대는 신문물을 접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 첫 세대라 하였던가. 그래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만 중시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수평적 사회 문화는 지향하지만 사회 질서는 거부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누군가 분석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연대의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라 꿰맞춰 본다. 앗, 아니다. X세대도 연대 경험이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열광하며 하나가 된 적도 있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응원할 때도 모르는 사람과 어깨에 손을 올리며 한목소리를 낸 적도 있다. 사실 나는 그 붉은 물결 속에 있지 못했지만, 먼 곳에서 TV를 보다 전율과 울컥을 반복하며 마음만은 그 무리 속에 밀어 넣었더랬다.
#그러다 연대가 삶에 들어오다.
그러다가 내가 사회문제의 당사자가 되면서 진짜 ‘연대’가 삶에 들어와 버렸다.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7년의 경력단절 꼬리표를 떼고 3년 전 사회로 다시 돌아왔다.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 지금은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 문제가 조금씩 다르게 접근되고 있지만(접근된다고 믿고 있지만), 내가 사회로 다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희귀한 일이었다. 여자는 3년만 경력이 단절되어도 영원히 사회에서 퇴출당한다는 고정관념이 만연했던 터라 어느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가능성은 늘 배제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사회로 다시 돌아왔다. 회사 임원이 된 것 이상의 승리감 내지는 우월감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는데, 나의 존재가 특별하여 집에만 있는 것을 신이 안타까워해 간택한 것 같달까. 물론 본격적인 사회생활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수없이 좌절을 맛보아야 했지만 말이다.
내가 간택된 배경에는 경력 단절 여성의 경력을 다시 이어주는 사회혁신 프로그램이 있었다. 경력보유여성 커리어 빌딩 플랫폼인 위커넥트와 사회혁신 기반으로 임팩트 생태계를 구축하는 루트임팩트에서 공동으로 기획 및 운영한 것으로, 여기서 신에게 간택된 여성 8~9명을 더 만났다. 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소정의 교육과정 을 이수 후 취업된 각자의 회사로 가 전전긍긍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쌓았다. 회사 내 선배나 동기가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선배와 동기가 되어주었다. 힘듦도 좌절도 그 안에서는 안전하게 내뱉을 수도 있었고, 위로받을 수도 있었다. 살아오면서 옷깃 한번 스쳐본 적 없던 사람들과 ‘오랜 경력단절 후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경험이라니. 처음으로 경험해 본 ‘연대감’이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다. 3~4회 정도 만나고 난 후였던 것 같다. 우리만 꽁냥꽁냥 할 것이 아닌 ‘경력단절 경험 당사자’로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알리고, 곳곳에 흩어져있을 경력단절 여성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 사회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뜻이 모여졌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고 결속하여 목소리를 더 크게 내고 흘러나가게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도 우리 안에서 쑥쑥 자랐다. 그렇게 해서 무리 중 셋이 팟캐스트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불끈불끈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시작이었다.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 줄 연대의 장을 틔우는 역사적인 일을 만들어낼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닥콩닥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종의 방송과 같은 것을 한다니, 두렵기도 했지만 잘 해내고 싶었다. 바쁜 회사 스케줄에도 함께 만나 머리를 맞대어 시나리오를 짜고, 녹음하는 일이 재밌었다. 편집의 수고가 곁들여져 밤을 새우거나 주말의 반나절을 반납해야 했지만 괜찮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재미지게 할 수 있나, 구독자를 늘릴 수 있나,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잘 만들어가나 싶었다.
#연대, 쉬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열정에 의해 강하게 결속되면 지속되기 어렵다고 해서인가. 한 해, 두 해가 흘러가고 우리들의 삶의 모양이 달라져서인가. 아니면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달라져서인가. 첫 시작 때의 의욕은 점점 사라져 가고, 대의를 위한 행위만이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사회문제를 가운데 두고 의미 있는 일을 함께하면 상대의 취향, 고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등등 우정과 사랑이 저절로 커져 사적인 영역에 대한 공유가 자연스레 넓고 깊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본업을 지키며 육아와 집안일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연대 기반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벅찬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여유 시간까지 만들어낸다는 것은 우리 모두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점점 정서적·감정적 교류가 말라가고 있었다. 이를 간과한 채, 공통분모로 엮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해내야 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나는 관계 중심적인 성향이 60%, 성과 중심적인 성향이 40% 정도 된다. 설명하자면, 일 때문에 만났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흐트러지면 일이 무너진다. 반대로 사람 때문에 일했지만 성과가 안 보이면 관계가 흐물흐물해진다. 그래도 사람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일을 만들어가는 것에 만족감이 더 높기 때문에 관계 중심적인 성향에 무게를 더 두게 된다.
이렇게 관계가 중요한 나인데, 메말라가는 정서적·감정적 교류로 인해 무엇 때문에 이 행동을 함께하는지, 꼭 해야 하는 일인지, 어떻게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연대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싶어진 이유이다.
#내 스타일의 연대를 찾아서.
위키백과는 ‘연대(連帶)’를 사회적 관계의 일종으로 특정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행동을 같이하거나 뜻을 함께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사회적 의미로는 맞는 이야기이다. 이와 함께 철학적인 의미를 정혜윤 작가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재난 참사로 가족을 잃은 슬픈 사람들끼리 만든 조직 (펜박 penvac이라는 이름의 조직이다)을 프랑스에서 취재한 일이 있었다. 조직의 목적은 슬픈 사람이 슬픈 사람을 돕는 것이었다. 이런 조직이 만들어진 덕분에 슬픈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단어 아래 모일 수 있었다. ‘연대’라는 단어였다. 슬픈 사람들은 그 단어 아래 모여, 그 단어를 임시 피난처 삼아, 다시 인간들 틈에서 짧은 위안을 구하고 어두운 마음을 헤집어 해야 할 말을 찾아냈다. 내가 프랑스에서 들은 연대의 정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에 속한다. ‘연대’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당신께 알려드릴게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도울게요. 당신은 나보다 덜 슬프도록요.”
그렇다. 같은 상흔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돕겠다는 이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연대를 위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지난 8년 동안 4월이 되면 우리는 이와 같은 경험을 해왔다.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는 모두 말없이 노란 리본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거리로, SNS로 퍼져나가며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엮여 풀어지지 않는 하나의 마음이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느슨해지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지속 가능한 연대의 비밀은 이처럼 ‘마음의 연결’을 기반으로 하는 공감과 ‘자율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해방 성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성환(2010)은 계층이나 직업 등과 같은 동질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한 기계적 연대는 힘이 없는 반면, 개개인의 위상과 의미를 보유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유기적 연대만이 지속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이해와 소통에 기초하는 인본주의적 성향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뜻밖의 상담소 김지연은 공감을 ‘마음의 연대’라고 하였다. 상대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곁에서 함께하는 마음의 연대로 공동체성 회복을 통해서만 사회적 연결이 의미 있게 되며 안전한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감이 연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대화’와 ‘소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상호 간의 이해가 이루어지면 정서적 연대를 넘어 실질적인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속 가능한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로 돌아가 보면, 나는 맺고 있던 연대에서 정서적 교류가 강처럼 계속해서 흘러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느슨함과 자율성보다는 끈끈한 연결과 동질성 바탕의 획일화를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필요했던 것은 서로의 아픔을 돌봐주며 마음의 연대를 쌓은 후 지속 가능한 실질적인 연대로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대화와 소통이 아니었을까?
‘연대’를 앞세워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 길의 시작도 설렘과 열정이 함께 했다. 지금은 정서적 연대를 쌓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공감’과 ‘소통’이 충분히 흐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이상한 기류가 감지된다면 무엇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지는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