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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Jun 05. 2022

감정의 기본값

감정이라는 연출이 적용된 삶이라는 영화

당신의 삶은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한 전쟁터인가요, 아니면 기쁨과 환희로 가득한 축제의 장인가요?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하나의 배경에서 스토리가 흘러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삶이든 그 시작과 끝이 어떻든 간에 장면은 끊임없이 바뀐다. 전쟁터 속에서도 사랑을 속삭이는 애틋함이 있고, 연인과 키스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폭발음은 폭죽이 되곤 한다. 반대로 하얀 꽃이 만발하고 나비가 나풀나풀 떠다니는 동산에서 사는 사람일지라도, 가슴에 칼이 꽂힌 채 꽃을 붉게 물들이게 될 수도 있다.

때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모를 순간도 있다. 한 마디로 기괴한 순간이다.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유유히 탭댄스를 추고, 꽃밭 위로 헬리콥터를 타고 염산을 뿌리는 듯한 느낌. 삶엔 그런 순간도 종종 존재한다.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에 감정이라는 색깔을 덧칠하여 나타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에 따라 내가 서 있는 장소의 의미는 달라진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장소, 지금 내가 담겨 있는 장면을 분석해 봄으로써 내 감정을 아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감정을 절제하며 살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억압하며 살았다. 불편한 감정, 나를 위협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그 결과 감정 자체에 둔감해졌고, 긍정적인 감정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 표현은 인간관계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지 못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대책을 세워야 했고, 웃는 표정을 연습하곤 했다.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억압을, 나는 '디폴트 유지 시스템'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평상시에 편안한 상태의 감정을 기본값으로 정해두고, 그 감정에서 위아래로 움직일 때면 재빨리 다시 기본값으로 원상 복귀시키는 시스템이 내면에 장착이 된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주관적인 느낌으로 추정하는 거지만, 내 감정의 기본값은 평균 -2 정도에 머무는 듯하고, +1에서 -5까지의 범위를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처음 했을 때는 5~6년 전이었고, 그로부터 다행히 감정적으로 좀 더 유연해지는 변화를 겪게 되어 이 '디폴트 유지 시스템'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금은 기본값이 +2 정도에 맞춰져 있고, +6에서 -5까지로 변동폭도 좀 더 넓어졌다.

감정선의 변화와 함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장면도 변해왔다. 감정 변화의 폭이 좁을 때는 슬픈 감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던 대신에 기쁨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어느 수준 이상의 기쁨에 도달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의 장면은 학교 수업 시간에 우연히 봤던 찰리 채플린의 대사 없는 흑백 영화와 같았다. 지금은 훨씬 알록달록 해졌고, 배경음악도 삽입된 영화에 들어와있는 느낌으로 살고 있다. 물론 매일이 그렇지는 않다. 아직도 흑백영화로 돌아가는 순간이 가끔 있지만, 이젠 흑백으로 재생되는 장면에 내가 직접 색을 칠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 삶은 딱히 주제도 없고, 감동과 반전도 없는, 연출력이 가미되지도 않은 평범하지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와 흡사하다. 하지만 더 이상 흑백으로만 상영되지 않아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만은 하다. 가끔씩 들려오는 배경음악이 나쁘진 않고 그럭저럭 들을 만하다. 가끔 일어나는 별 볼일 없는 에피소드에 때론 피식 웃기도 한다. 내 삶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딱히 재미는 없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이제 슬픈 영화를 보며 울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동화되거나,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감동받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의 하루, 나의 삶이 어떤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전반적인 감정의 맥락이 보인다. 감정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기 마련이므로 꾸준히 관찰만 하면 알 수 있다. 감정의 맥락을 파악하고 나면 나에게 왜 이러한 감정 습관이 생겼는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우리는 어떤 감정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다 할지라도 쉽게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감정 습관의 원인을 알아냈다면 거기서부터 자기이해는 한층 더 발전한다. 그리고 나아가 원하는 감정 습관으로 바꿔볼 수 있고, 변화된 감정의 맥락 속에서 내가 속한 인생의 장면을 원하는 대로 연출할 수 있게 된다. 일어나는 사건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어디를 클로즈업할 것인지, 어떤 등장인물을 핵심적으로 조명할 것인지, 어떤 배경음악을 삽입할 것인지를 정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감정은 삶이라는 영화의 연출적 기법을 결정한다. 당신이라는 감독은 어떤 연출에 갇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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