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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Aug 29. 2021

게으른 완벽주의자.

완벽주의에 대하여.

완벽주의란


  여러분은 어떤 일이든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고, 노력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그렇습니다.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의미 있을지라도 결과가 '실패'라면 너무 괴롭기 때문이죠. 많은 책들이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라'라고 말하지만, 결과가 계속 신경 쓰입니다.


  완벽주의 그 자체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만족스러운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있습니다. 완벽하고 싶으니 얼마나 애를 쓸까요? 그래서 완벽주의가 건강하게 작용하면 우리는 뛰어난 성취를 이루고, 이로 인해 자신감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라나 '완벽함'의 기준이 너무나도 높고, 비현실적일 때 완벽한 성취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감을 얻기는커녕 원래 갖고 있던 자신감까지 탈탈 털려 잃어버리게 됩니다.


  완벽주의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완벽함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람에 따라서 일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걸 넘어, 인간관계에서도 완벽함을 원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좋은 친구'의 기준을 세워두고, 이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이죠. 그리고 상대방 또한 이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끝없는 노력을 강요받는 처지가 되죠. 가족관계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완벽주의적인 부모는 자녀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합니다.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이렇게 해야지'부터 시작해서, 90점을 받은 훌륭한 시험지를 들고 와도 "10점이나 부족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부모의 기준을 내면에 받아들여 살아가는 자녀는 살면서 제대로 된 성취의 경험 없이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적군이 없기 때문에 승리도 없죠.




완벽하고 싶어서 엉망이 된다


  저는 중학생 시절부터 공부에 있어 한 가지 원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선택과 집중'입니다. 다섯 가지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 이 중에 자신 있는 과목 2~3개만 선택하여 공부하고, 자신 없는 과목은 깔끔하게 포기한다는 원칙입니다. 대체로 선택하는 과목보다는 포기하는 과목의 수가 더 많았기 때문에, 제 성적은 자연스럽게 떨어져만 갔습니다. 그런데도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공부를 안 해서 그래. 하면 잘할 거야!'라는 흔해빠진 변명을 대면서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자신을 속였습니다.


  공부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함에 있어서도 제 완벽주의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부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공 가능성을 추측해본 후 노력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적은 것만 고르려고 애를 썼습니다. 물론 그마저도 한 달을 지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저는 해보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할 자신이 없어 시도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오히려 소중한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제 삶을 후회로 채우고 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부딪혀보는 노력을 더 했더라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오래 묵은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고르고 골라 구해보고 있고, 새로운 경험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완벽주의로부터 멀어지기


  제가 완벽하고 싶은 이유는,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저는 부모님을 포함하여 다른 어른들로부터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결과도 좋은 학생이었죠. 그러나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늘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저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죠. 그러다 문득 어린 저에게 왜곡된 생각이 생겨버렸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지금도 어머니는 나와 함께 해주지 않는데, 만약 공부도 못하면 어쩌지?'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00이는 알아서 잘하니까 엄마가 걱정 안 해." 그리고 저에겐 또 이런 생각이 떠올랐죠. '알아서 잘하는 지금도 나와 함께 해주지 않는데, 알아서 못하면 어쩌지?' 저는 이때부터 완벽주의에 조금씩 침식당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주변 어른들에게 계속 칭찬을 받기 위해, 마음 깊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서 말이죠.


  지금은 완벽하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저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도 늘 저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바쁘셨다는 걸 이해합니다. 그리고 제 기준에서 완벽해지더라도, 결국 저를 인정해주지 않을 사람은 끝까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은 1~2명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완벽주의를 조금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양 발에는 완벽주의가 잔뜩 묶여있어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고,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방안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도전할 수 없으니 게을러지기만 합니다. 이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현실을 잊으려고 자꾸 유튜브와 책 속으로 도망칩니다.


  완벽주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우선 제가 가진 성공의 기준이 매우 높다는 걸 인정해주려 합니다. 비현실적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밀며, 과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100m를 13초 안으로 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15~18초 내로만 뛰어도 빠른 편입니다. 물론 20초 밖으로 뛰어도 괜찮습니다. 달릴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건가요? 저는 현실을 당연하게만 여기면서, 비현실적인 걸 바라며 괴로워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제가 가진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기억하면서, 실패하는 연습을 해보려 합니다. 물론 삶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실패에 대책 없이 부딪혀서는 안 될 겁니다. 건강이나 돈 등 소중한 걸 잃지 않아도 되는 실패에 한하여 하나씩 도전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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