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나', 또는 '반밖에'.
물컵에 든 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물의 양이 얼마나 남아 있다고 보시나요? 아직 '반이나' 남았나요? 아니면 '반밖에' 남지 않았나요?
이 질문은 아주 고전적이고, 누군가에겐 식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구나 한 번 이상 접해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엔 이 질문을 던져 준 사람이 제가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누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저의 대답은 "반밖에 안 남았네"였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의 목적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반이나 남았네'라고 대답할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니까요.
물컵에 든 물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라면 어떨까요? 우리의 삶이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기에, 지금 현재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큼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50년의 세월이 남았을지, 1년의 시간이 남았을지 누가 알까요? 그저 많이 남았기를 바랄 뿐이죠. 중년에 접어들고, 노년에 접어듬에 따라 점차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청년인 사람이라면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겁니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같은 연령이더라도 남은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건 마치 컵에 든 물의 양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있다고 느낍니다.
제게는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정확히 제게 주어진 시간의 절반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저는 30년을 살아왔고, 그렇다면 남은 시간도 30년이라고 가정해 보죠. 30년이나 남은 걸까요? 30년밖에 남지 않은 걸까요?
먼저 30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30년이나 남았으니 저는 조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삶을 정리하고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데 5년 이상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원하는 일을 하며 열정적으로 사는 건 제 생각엔 10년이면 충분합니다. 10년 정도면 해보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하나 또는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직 15년이 남았네요. 먹고, 자고, 매일매일 빠짐없이 소비되는 시간도 1~2년 정도 될 겁니다. 그러니 최소 10년 정도는 여유롭게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 겁니다. 30년이란 시간은 충분히 많은 시간입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낼 생각에 괜스레 흥이 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3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단 지금까지의 30년을 되돌아봤을 때, 저는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이루어낸 것도 그다지 없습니다. 앞으로의 30년간 뭔가를 이룰 거란 보장을 할 만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또한, 누구나 그렇듯이 환경에 따라, 여건에 따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써버려야 하는 시간이 매우 많습니다. 이렇게 소모되는 시간이 1년 일지, 5년 일지, 10년 일지, 혹은 30년 전부일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뜻하지 않은 경험 속에서도 저를 위한 무언가를 발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저에겐 삶을 정리하는 시간은 더 이상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등바등 노력만 하다가 끝날지도 모르죠. 30년 동안 고통만 받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왠지 어깨와 목 근육이 뻐근해지는 느낌입니다.
'반이나', '반밖에' 두 가지의 관점뿐만 아니라 한 가지 관점이 더 있습니다. 바로 '반 남았다'입니다. 많이 남은 것도, 적게 남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냥 반이 남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인 현실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반이나 남았네'라고 볼 수 있어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올바른 긍정이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닐까요? 긍정의 한자를 살펴보면, 옳게 여길 긍(肯)에 정할 정(定)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옳게 여기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정하는 것, 이것이 긍정의 진짜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올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고, '왜곡해서 바라보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다며 비관한다면 조급한 마음에 섣부른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실수가 많아지고, 후회가 많아지고, 점점 더 시간에 쫓기게 될 겁니다. 걱정하는 데 시간을 다 써버릴지도 모릅니다. 걱정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다시 좌절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좌절에 익숙해지고 불안에 잡아먹힌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세상을 탐험할 수 없고, 혹여나 나를 헤칠지도 모를 낯선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합니다. 물론 적당한 불안과 긴장은 실행력과 수행능력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에는 이러한 불안의 선기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반이나 남았다며 낙관한다면 안일해질 수 있습니다. 마치 겨울이 다가오는 데도 노래만 부르던 베짱이처럼, 혹한에 벌벌 떨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베짱이는 개미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처한 현실은 베짱이의 경우처럼 녹록지 않습니다. 사회엔 여전히 친절한 사람들이 많지만, 사람에 대한 두려움 또한 많이 증가하여 쉽사리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선 일하지 않는 무소유의 베짱이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앞날을 대비하고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스트레스는 덜 받겠지만, 흐리멍덩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저 반이 남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우리는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어느 한쪽에 치우친 관점을 가지면 그로 인해 다른 한쪽 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우리는 '편견'이라고 부르기로 했죠. 긍정적으로만 보려 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사실에만 집중하면 장단점을 함께 고려할 수 있고, 적절한 긴장과 낙관성을 함께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물에서 다시 시간으로 돌아와 봅시다. 30년이 남았다고 가정하고서, '그저 30년이 남았다'라고 생각해본다면, 30년밖에 없다며 불안할 이유와 30년이나 남았다며 허송세월을 보낼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30년이 남았으니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낼지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죠. 조급해하지는 않으면서 말이죠.
좋게도 나쁘게도 아닌, 올바르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법. 이것이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긍정'입니다. 물론 언제나 중립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편견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저 "난 편견이 없어"라고 말하는, 편견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이죠. 편견에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도록 도와준다는 장점과, 다른 한쪽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는 단점이죠.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면 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누군가 이 글 첫 부분에 실은 그림과 같은 물컵을 보여주며, "물이 얼마나 남았어?"라고 물어본다면, "반 남았네"라고 대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