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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Sep 28. 2021

저 벤치에 누워, 외로운 사람 될까.

[내가 좋아하는 장소].

벤치에서 바라보는 세상


  여러분들은 어떤 장소에서 가장 편안해질 수 있나요? 아마 내 집, 내 방 안을 많이 고르실 것 같습니다. 아닐 수도 있고요. 집 안을 제외하고 골라본다면 어떨까요? 저는 '벤치'를 고를 겁니다. 벤치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벤치에 누워서 바라보는 세상은 각별합니다. 세상이 멈춘 듯하면서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풍경에서 왠지 모를 판타지를 느끼기도 합니다. 누워서 바라보면 우선 걸을 때보다 눈높이가 낮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또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죠. 땅을 기어 다니는 개미 무리가 보이고, 길에 뿌려져 있는 돌멩이들도 보입니다. 하늘을 마주 보고 누우면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만 같은 느낌도 들어요. 두둥실 떠올라서 하늘 한가운데 누워있다는 착각이 들곤 합니다. 등에서 느껴지는 딱딱함만 없다면 더욱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다시 앉아볼까요? 저는 벤치에 앉아있을 때면 평소보다 더 사람들의 표정이 잘 보입니다. 전화통화를 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아저씨에겐 어떤 일이 생긴 걸까요? 손을 잡고 있지만 서로 눈은 맞추지 않는 커플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멋대로 스토리를 지어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




공간의 필요성


  가만히 서 있거나 걷거나 앉을 때, 우리는 언제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 공간이나 좋은 건 아니에요. 편안하다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죠. '내 영역'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영역을 느끼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상징물 또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집'이라는 경계 안에서도 '문'으로 나누어진 방, '벤치'라는 상징물로 정해진 영역은 만족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호한 걸 싫어합니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경계를 잃어버리거나, 상징물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길을 잃은 듯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중에서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고립되진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제겐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공간을 필요로 하고, 선택하고, 직접 찾아가 머물다 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닙니다. 어째서 놀이공원이 아닌, 번화가가 아닌,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공원 또는 산책길의 벤치를 좋아하는 걸까요? 어떤 장소를 좋아하든지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목적과 동기가 존재합니다. 여러분도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장소를 떠올려 보아요. 여러분이 그곳을 좋아하고 머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채워지는 뭔가가 있거나, 얻는 건 없더라도 최소 뭔가를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여러분의 감정과 이어져 있을 겁니다.

  제 얘기로 다시 돌아와서, 저는 식물에 둘러싸인 자연을 좋아하지만 숲 속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언제, 어디서, 어떤 벌레가 제게 날아올지 알 수 없어서 두렵습니다. 벤치에 있을 때도 벌레가 날아들곤 하지만 숲 속보다야 훨씬 낫습니다. 아, 꽃 주변은 피하는 편입니다. 벌이 날아올 수 있거든요. 또한, 혼자 있고 싶지만 곁에 누군가 있어주길 바랍니다. 제게 말을 걸지 않지만 계속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환경이 참 좋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선 내향적인 사람이든 외향적인 사람이든 꼭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완전히 홀로 있을 땐 생각에 짓눌려 무기력해지기도 합니다.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거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 생각이 멈추는 순간이 생겨 무기력해지지 않더군요. 대화는 나누지 않지만 누군가 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저의 외로움을 덜어주어 좋습니다.

  벤치를 찾아 나서는 또 한 가지의 이유는 '불편함을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극도로 편안한 걸 좋아해요. 그래서 더욱 나태해지는 것 같아요. 일부러 불편함을 겪기 위해 시간을 내려합니다. 찬물 샤워를 하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 또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는 저로선 찬물 샤워를 할 용기는 나지 않습니다. 잠도 많아서 미라클 모닝도 감히 시도하지 못합니다. 아침 8시에만 일어나도 저에겐 미라클입니다. 편안한 침대를 벗어나 딱딱한 벤치에 앉는 것 정도가 지금 제가 견딜 수 있는 불편함입니다.




오늘도 산책을 나선다


  벤치를 찾기 위해 저는 산책을 나섭니다. 이왕 나온 김에 소소한 모험도 즐기고요. 제가 사는 동네일지라도 가본 적이 없는 골목이 많습니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도 나름 즐겁습니다. 되도록이면 멀리까지 걸어보고 싶은데, 체력이 부족하여 동네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산책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간의 심리학》에서 저자인 발터 슈미트는 "사람들이 자리를 선택하는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보통은 개인적 관점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하는 것, 그리고 개인적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등의 감정, 이 두 가지 사이의 타협점에서 자리를 고르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벤치를 선택하는 배경에는 자연의 곁에 있을 수 있고 불편함을 감수하려고 시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기는 싫은 두 가지 감정의 타협점이 되어주는 장소가 바로 벤치입니다.

  여러분은 평소 산책을 즐기시나요? 이 글을 읽은 오늘 또는 내일, 시간을 내어 잠시 산책을 나서보는 건 어떨까요? 《월든》에서 소로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내쉰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은 시들고 있다. 아침저녁에는 차라리 그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매일 걷는 걸음보다 더 멀리 뻗쳐 있다. 우리는 매일 먼 곳으로부터 집에 돌아와야 하겠다. 모험을 하고, 위험을 겪고, 어떤 발견을 한 끝에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성격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야 하겠다." 멀리 모험을 떠난다고 새로운 발견을 반드시 얻는 건 아닙니다. 떠나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우리에겐 낯선 환경이 필요하고, 새로운 경험이 필요합니다. 항상 보던 것만 본다면 새로움에 적응하는 능력이 퇴색될 수 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보아요.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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